'장한 어버이상' 받은 용두동 장상희씨이 삶 '훈훈한 뉴스'

 

35살 젊은 나이에 혼자된 아버지가 밥 한번 거르지 않고 4남매를 알뜰하게 키우고, 장가 간 아들네 김장 김치까지 절여주는 흔치않은 사연이 알려지면서 흐뭇한 뉴스가 되고 있다.

지난 5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사)한국효도회가 주는 장한어버이상’을 받은 장상희(67세)씨가 이 흐뭇한 뉴스의 주인공이다. 덕양구 용두동에 살고 있는 장상희씨는 한 장 상장으로는 담지 못할 자식에 대한 큰 사랑을 실천한 참 따뜻하고 아름다운 아버지였다.

 

1960년대 중반, 지금의 아내는 친구를 보러 우연히 동네에 들렀다가 그 동네에 있던 장상희씨와 만나게 되면두 사람은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꿈같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까지 골인해 2남2녀를 낳고 알콩달콩 살았다. 하지만 그 행복한 결혼 생활은 14년 만에, 짧게 끝났다.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나버렸다.

“넉넉한 살림이었다면 일찍 손을 썼을 텐데 돈이 없어서 병을 길렀어요. 아내가 떠난 지 32년이 지났지만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 때나 지금이나 아픈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던 남편은 아내를 떠올린 그 짧은 순간도 괴로운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맏딸은 13살이었고, 둘째는 12살, 셋째는 11살, 그리고 막내는 용두초등학교 병설유치원생이었다.

그땐 나무를 떼서 밥을 했을 시절이었다. 세탁기도 냉장고도 없었다. 아침이면 네 아이가 먹을 밥을 준비하고, 엄마들도 힘들어했던 도시락 4개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챙겼다. 보통의 아버지 같으면 딸들에게 많이 시켰을 텐데, 장상희씨는 최대한 엄마의 빈자리를 온전하게 메워 주었다.

“주말이면 우물에 가서 일주일치 빨래를 해오는 딸들이 너무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어요. 엄마가 있었으면 저리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과, 불평 없이 일을 거드는 딸들이 고맙기도 했지요.”

빨래하느라 차가워진 손을 보면 측은한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이 따뜻한 아버지는 집안 살림 다 하고,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겨울엔 아이들 씻을 따뜻한 물을 준비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사서 일하면 밥해주는 일이 부담스러워 열다섯마지기 농사를 혼자 지었다. 혼자 최대한 빠르게 일을 하다 보니, 논 600평 추수를 하루에 훌쩍 해버린다. 농한기에는 자식들 학비라도 벌 생각으로 공사장에서 일했다. 고됐던 삶을 그는 추억이라고 말한다.

“그 친구 사는 모습을 보면 참 바보스러웠어요. 새 장가를 갈 수도 있고, 딸들이 알아서 하라고 떠밀 수도 있는데, 집안에서 또 밖에서 그냥 죽어라고 일만 하더라구요. 아이들도 엄마 있는 집보다 더 잘 키웠죠.”

수 십년 장씨를 가까이 지켜 본 친구 이상균씨는 장씨를 ‘참 바보처럼 선량하고 성실한 아버지’라고 말한다. 장상희씨는 신도농협 대의원으로 활동했고, 45년 된 친목회 회장을 10여 년째 맡고 있다. 마을 애경사는 누구보다 먼저 찾았다. 그 바쁜 와중에 동네일까지 꼼꼼히 챙긴 것이다. 이상균씨는 “이 사람은 가정에서는 장한 어버이고, 지역에서는 장한 이웃” 이라며, 가정일이든 마을일이든 모두 성실하게 해내는 그를 두고 동네사람들은 “뭐 하나 버릴 게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장상희씨는 지금도 1,000여 평을 빌려 시설하우스 채소농사를 짓고 있다. 자녀를 모두 출가시켰으니 노년을 편안히 보낼 수도 있으련만, 그는 “우리 같은 사람은 일 안하면 죽는다. 일을 해야 그나마 술을 덜 마신다”며 여전히 열심히 일한다. 멀리 여수로 시집간 딸은 아버지가 혹시나 빈속에 술을 드실까 걱정되어 늘 안주거리를 챙겨 보낸다.

평생 일만하며 살아왔던 그에게 취미가 있었을까. 10여 년 전 우연한 계기로 낚시를 하게 되었다. 일만 하던 그가 자전거에 낚싯대를 싣고 새벽같이 적개다리에 가서 낚시를 했다. 낚시바람이 든 것이다. 아침도 굶고, 점심도 쫄쫄 굶어가며 기다림의 손맛을 즐기던 그는 어느 날 낚싯대 모두를 없애버렸다. “이거 계속했다가는 일 못 하겠더라”는 게 이유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의 유일한 취미생활은 일에 밀리면서 그렇게 끝났다.

 장상희씨는 집안살림 경력 32년째인 만큼 음식솜씨가 대단하다. 그의 음식맛은 온 동네 사람이 다 인정한다. 녹두 갈아 앙금 앉힌 뜬 물에 묵은 김치와 비지를 넣어 끓이는 묵물국을 어찌나 잘 끓이는지, 동네 사람들은 이 국 한 그릇 얻어먹는 재미에 장씨네 집으로 모여든다.

온갖 반찬은 물론이고 된장, 고추장, 김장김치, 열무김치 등 못 만드는 음식이 없다. 지금도 김장 준비를 다 해놓으면 며느리들이 와서 김장 속을 넣어 간다. “아버님이 해주셔야 김장이 맛있다”며 애교스러운 며느리들 보는 맛에 고된 일도 행복하게 느낀다는 장상희씨.

 “서른다섯에 혼자되었을 때, 결심 했었어요. 나 하나 희생하면 애들 넷 잘 키울 수 있으니, 엄마의 몫까지 다 하자고요. 자식을 위해 부모가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요. 자식 키우는 보람에 아무리 고된 일도 추억처럼 지나가버렸던 것 같아요.”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큰 바위 얼굴’의 깊고 넓은 인품이 느껴진다. 참 아름다운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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