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보훈대상자 자활촌 ‘신도 용사촌’

보훈의 달을 맞이해 덕양구 지축동 765-187번지 ‘대우철물’ 인근에 위치한, 전쟁 보훈대상자 가족 자활촌인 ‘신도 용사촌’을 찾았다. 이곳에서 이선택(69세) 용사촌 회장과, 친형이 국가유공자여서 부모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는 이상덕(59세) ‘대우철물’ 사장을 만났다.
이상덕 사장의 친형인 이상훈씨는 6·25전쟁 당시 경복중학교를 다니다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전투 중 부상을 당해 상이용사가 됐다. 이상덕 사장이 용사촌으로 이주한 것은 부모님과 함께 이곳으로 따라나선 1970년이었다. 그 당시 이 사장은 중학교 3학년, 16세 소년이었다. 이 사장은 중학교 졸업 후 인근 삼송리 고양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부터 쌀과 연탄 장사를 하는 부모를 도운 이상덕 사장은 결혼 후인 1987년부터 부인 황경희(55세)씨와 ‘대우철물’이란 간판을 달고 철물과 건재상회를 개업해 26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축동에서 유일한 철물점인 ‘대우철물’은 대부분 주민들이 필요한 각종 주택 재료를 취급하고 있다. 이상덕 사장은 신도 용사촌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현재까지 한눈에 보이는 듯 훤하게 알고 있었다.
이선택 용사촌 회장은 1967년 5월 해병 2여단 청룡부대로 월남전쟁에 참전했다. 이 회장은 월남전에서 하사관으로 참전, 1년 동안 기관총 분대장을 맡았다. 비록 이국만리에서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추석날이었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한국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베트콩들은 일제히 폭격을 가했다. 그 당시 이 회장은 한쪽 눈을 실명하고 온몸에 폭탄의 파편을 맞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위급 상황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병원선으로 후송된 이 회장은 그 바람에 전사자로 분류됐었다. 생존자가 기록에 없는 상태에서 후송됐기 때문이다.
신도 용사촌은 1968년경에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우여곡절을 많이 가진 곳이었다. 기지창(전철 차량기지) 인근 노고산 자락 뒷동산 아래에 ㅁ자 석가네 기와집과 삼송리 방향 끝자락에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초가집에 거주한 사람들은 지난해 100세를 맞이한 할머니 가족이다. 이들은 대나무가 많이 나는 전라도 고향에서 소쿠리(대나무로 만든 그릇)를 가져와 신도면 일대를 다니며 장사를 했다. 가끔은 농촌 인근을 다닐 때 일손을 거들다가 이곳 사람들과 정들어 아예 가족들이 모두 신도 용사촌으로 이사를 왔다.
신도 용사촌에는 6·25전쟁 참전용사 11명과 월남 파병용사 11명 등 총 22명 살고 있었다.그런데 일부는 자식에 의해 동산동 용사촌으로 옮겨가고, 일부는 요양병원으로 들어갔다. 현재는 미망인들을 포함해 8명의 참전용사 가족이 남아 있다.
1970년대 골프장인 ‘뉴컨트리클럽’에서 신도 용사촌에 거주하는 22명에게 100만원씩 몇 번에 걸쳐 도와주기도 했다. 가끔 밀가루, 쌀, 옷 등 위문품도 들어왔었다. 이상덕 사장은 “어느 때 부터 국가에서 개인적으로 돕지 말라고 해 도움이 중단됐지만 그 대신 국가에서 연금을 조금씩 올렸다. 큰 병이 났을 때 중앙보훈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지금은 각 지역 보훈지정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선택 회장은 가끔 집 안 뜰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 회장은 “월남전에서 죽어간 동료들 생각에 그들의 영혼이라도 불러 술잔을 나누어 마신다” 며 “죽은 전우의 영혼에 안부를 물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광경을 보면 정신이 나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혼자 살아남아 미안한 마음에 이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바라는 것은 다만 국가의 부름을 받고 충성으로 헌신한 것을 사람들이 잊지 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