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곡 출신 70년대 축구스타 이영무 고양 Hi FC 감독

▲ 골을 넣을 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81년 할렐루야 축구팀 시절, 당시 28세였던 이영무 감독. 이 감독은 다음해인 82년에 선수로서 은퇴한다.(사진 왼쪽) 올해 예순을 맞이한 이영무 고양 Hi FC 감독은 고양시 유청소년들이 미래 축구인재로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육성 및 지원에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 (사진 오른쪽)

지도체육대회 축구선수 뛰며
70년대 악바리 국가대표 성장 
왜소한 체격, 훈련으로 극복

열렬한 축구팬이라면 70년대 국가대표로서 경기장을 제집처럼 휘젓다가 골을 넣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기도 세레머니’를 펼치는 한 선수를 기억할 것이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렸지만 체격이 너무 왜소했기 때문에 눈에 띄었던 이 선수는, ‘체력’으로 경기를 한 것이 아니라 ‘품성’으로 공을 쫓았다. 2000년대에 박지성이 있다면 1970년대에는 대한민국에 이 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가 바로 고양의 능곡 출신인 이영무(60세) 고양 Hi FC 감독이다.

“한 경기를 통해 보통선수는 10km를 뜁니다. 박지성이 한 경기에 13km를 뛴다고 하는데 나는 최고 20km 가까이 뛴 적도 있습니다.” 이영무 고양 Hi FC 감독은 축구 천재도 아니었고 선수시절 체격도 좋지 않았다. 선수시절 키가 1m65cm, 몸무게 53kg이었다. 주력도 100m를 뛰면 13초대에 머물렀다. 축구선수로서 대성할 수 있는 요건을 하나도 갖추지 않은 대신 남들에 비해 뛰어난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재능’이었다.

“70년대 같이 국가대표로 뛴 차범근 형이 체격 좋고 주력이 뛰어난 불세출의 스트라이커였다면 나는 그저 지구력이 강한 선수였어요. 평소에 훈련을 많이 해서 부지런한 선수로 인정받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 했어요” 

1976년 말레이시아와의 ‘박대통령컵’ 개막전에서 차범근이 경기 종료 5분여를 남기고 3골을 기록할 당시, 차범근이 골만 넣으면 쏜살같이 볼을 주워 센터서클로 달려가 경기재개를 재촉한 것도 이 감독 특유의 악바리 근성과 부지런함이었다. 이 감독이 1970년대 국가대표로 뛰면서 넣은 50여 골은 ‘어쩌다가’ 나온 골이 아니라 죽어라고 뛰고 또 뛴 결과 나온 ‘어쩔 수 없는’ 골이었다. 

이 감독이 축구공을 처음 만진 것은 7살에 들어간 능곡초등학교 시절. 1950년대 후반 당시에는 축구공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소나 돼지를 잡는 집에서 겨우 얻은 오줌보에 바람을 넣고 표면에 새끼줄을 엮어서 축구공으로 사용했다. “내가 살던 능곡의 뒷산을 우리들은 ‘사뫼’라고 불렀어요. 대여섯 살 무렵부터 ‘사뫼’에서 한참 축구하다가 얼굴에 3군데나 상처를 입었어요.”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 감독에 이르기까지 3대는 능곡교회의 장로로 있었던 능곡의 토박이었다. 특히 이 감독의 아버지인 이광문씨는 오랫동안 지도면장을 했고 말년에는 우체국장에 재임하기도 했다.

▲ 미드필드를 중심으로 축구장을 누구보다 열심히 휘젓다가 골을 넣기라도 하면 이영무 감독은 늘 '기도 세레머니'를 펼쳤다.


이 감독이 축구 국가대표로 성장하는 데는 지도면에서 8월 15일마다 열리는 체육대회를 빼놓을 수 없다. 작년까지 67회를 맞이한 지도체육대회는 지금의 능곡·행주·행신·화정 등 옛 지도지역에서 광복 이후 해마다 열리는 지역 최대 잔치이자 운동회였다. 지도체육대회에서 능곡 대표로 뛴 이 감독의 축구실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당시 능곡에서 공을 차던 이 감독이 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로 대성하게 한 것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국가대표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다른 선수보다 더 뛸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믿음을 갖고 늘 노력했고 결국 국가 대표선수, 그것도 차범근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골을 넣은 선수가 됐다.

“국가대표로 뛰다가 골을 넣고 고향인 능곡으로 오면 카퍼레이드를 해야 하는데 당시 시골에 어디 자가용이 있겠어요? 경운기로 카퍼레이드를 했어요. 이를 본 인근 군부대에서 지프차를 내주기도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이 감독에게 축구의 섬세한 기술을 전수한 이는 이중구 전 고양시의원이었다. 1960년대 당시 경희대 체육학과에 다니고 있던 이중구 전 시의원은 이영무 감독이 다니던 능곡중학교에서 얼마간 축구 코치를 했다. 이 감독은 “드리블, 슈팅, 패스 등 기본기를 이 의원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열심히 뛰기만 했지 기술적으로 부족했는데 중학시절 이 전의원으로부터 많은 기술을 배웠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감독의 친형인 이영길(67세)씨는 지금도 이중구 전시의원과 절친한 사이다.

이영무 감독은 늘 고향인 고양에 프로축구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이 바람은 이뤄졌고 그는 고양 Hi FC의 초대감독을 맡게 됐다. 2부리그이기는 하지만 고양에 프로축구팀인 고양 Hi FC를 유치하는 데 이 감독은 막후 역할을 했다. 고양 Hi FC는 올해 3월부터 고양시 유청소년들이 미래 인재로 성장하도록 다양한 육성 및 지원에 나선다.

“우리 고양에서도 프로팀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운영하는 축구교실을 통해 고양의 어린이들이 꿈을 버리지 않고 고양의 프로축구선수로, 그리고 국가대표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얼핏 상투적인 말 같지만, 어린시절 물을 채운 돼지 오줌보를 차며 능곡의 뒷산을 뛰어다니던 소년이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고, 고향의 프로축구 감독이 된 이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보노라면 이 말에 진심이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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