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독립운동사’ 집필한 이정은 대한민국 역사문화원장

고양지역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고양독립운동사’가 최근 출간됐다. 고양시의 지원 아래, 고양시 간행위원들의 도움을 받은 이정은 대한민국 역사문화원장의 집필로 출간된 이 책은 국가 단위가 아닌 지역 단위의 독립운동사의 세세한 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양 독립운동사 내용을 이정은 원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다.  

▲ 이정은 원장은 “‘노블리스 오블리주’ 사례를 볼 수 없는 것은 고양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 고양의 독립운동사가 다른 지역과 비교해 가지는 특징이 있나
고양의 독립운동은 본격적으로 1907년부터 일어났다. 고양의 3·1운동은 서울의 3·1운동과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양상으로 전개됐다. 고양은 서울의 문화와 정보를 거의 동시에 공유했기 때문이다. 3·1운동 기획자들은 이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 전단문건을 뿌리기 시작했는데 확인된 73건의 전단문건 중 32건이 고양지역에 집중적으로 뿌려졌다. 이러한 결과로서 고양에서는 마차꾼, 소달구지꾼, 일용노동자, 인쇄공 등 하층 노동자 계층이 주도하는 시위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고양은 독립운동의 대중화가 가장 잘 발현된 곳이다.
고양 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상대적으로 많이 참여했다는 점도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사포면 대화리, 송산면, 원당면, 구지도면 등 각 면의 동리마다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 기금으로 고양에서 총 498원 53전과 백동화 4287량 55전이 모아졌다. 여기서 고양사람들의 치열한 국권회복 의식을 엿볼 수 있다. 

- 고양의 독립운동가 74명의 면면은 어떠한가.
고양의 독립운동가 74명은 모두 공식적으로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신청을 못했거나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서 포상을 못 받은 분들도 있다. 74명의 독립운동가 분포를 보면,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가 29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밖의 국내독립운동 15명, 만주독립운동 9명, 의열투쟁 3명, 미주지역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활동했다.
74명의 독립운동가 중 사회적 특권계층이었던 사람은 3명뿐이었다. 연해주 의병운동의 지도자 이범윤, 경술국치 때 자결 순국한 김석진, 고종의 해외망명을 추진하는데 5만원의 거금을 보탠 민영달 외에는 모두 민초들이었다. 이렇게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주’ 사례를 볼 수 없는 것은 고양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사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 74명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만한 분은.
아무래도 대통령장을 받은 이범윤, 이필주, 김익상 선생 등 3명이다. 이범윤 선생은 간도의 동포를 보호하기 위해 간도 관리사로 갔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며 러시아로 망명해서 연해주 의병의 중심적 지도자가 된 분이다. 이필주 목사는 정동제일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3·1운동 준비 모임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김익상 선생은 일본 육군 대장인 다나카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원이었다. 이 3명의 출신지가 당시는 고양이었지만 지금은 서울로 편입됐다. 

- 책을 저술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있었나?
고양의 독립운동 사실관계가 풍부하지 않을까봐서 내심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기우였다. 특히 고양에서는 청년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청년들이 야학을 하면서 독립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활발히 했다. 향촌세력이 강력하지 않았던 고양은 독립운동의 대중화를 가장 잘 보여준 지역이었다. 

이병우 기자 woo@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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