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산사태 이후 첫 발굴... 원형복원의 중요 실증자료 획득

행궁(行宮)은 왕이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 또는 이궁을 뜻한다. 조선시대에 들어 전란시 피란처(북한행궁·남한행궁·광주행궁), 능행차시 거처(화성행궁), 강무시 거처(철원행궁), 휴양소(온양행궁) 등의 목적에 따라 각지에 지어졌다.
이 중 고양시가 유네스코 등재를 준비하고 있는 북한산성 행궁이 작년 10월부터 진행했던 1차 발굴조사를 통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당시 산사태로 파묻힌 이후 100년 만에 원형발굴이 이뤄진 것이다. 15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발굴지에서 진행된 현장설명회에는 문화재 관계자와 학계, 언론 등이 대거 참석해 큰 관심을 나타냈다.
이번 발굴조사지역인 내전영역은 사적공간으로 집무를 보는 외전과 구분된 것이다. 행궁이 초창된 지 33년 뒤에 간행된 ‘북한지’에 따르면 총 115칸 가운데 내전영역은 총 54칸으로서 내전 28칸, 좌우 행각방 각각 9칸, 청 5칸, 중문 1칸, 대문 3칸, 수라소 5칸, 증문 및 측소 2칸으로 이뤄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마루와 온돌을 갖춘 총 28칸(가로 7칸, 세로 4칸)의 건물지가 발굴됐다. 건물 앞쪽으로 어도가 대문으로 이어져 있으며 좌우에 행각이 딸려있는 구조이다.

조사단은 “이들 건물터는 재료와 축조 방법에서 당시 성숙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데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설한 구들이 남아 흥미롭다”면서 “또한 중심 영역을 둘러싼 배수로 처리와 뒷면 계단, 내전 영역과 바깥을 구분하는 내·외곽 담장터는 궁궐 내전에 걸맞은 위용을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이번 조사결과로 인해 17~18세기의 건축기술변화와 여지껏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행궁원형복원의 중요한 실증자료를 획득한 것이다. 그 밖에 건축 석재와 용문·봉황문·수자문·거미문·화문 등의 각종 막새기와, 치미·용두·잡상 등의 기와류, ‘己巳’(기사)·’辛訓’(신훈) 등의 글자를 적은 수키와, 건축물에 사용한 철물이 다량 출토됐다고 조사단은 밝혔다.
“1745년에 편찬된 ‘북한지’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박현욱 경기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의 말처럼 이번에 발굴된 행궁내전 영역은 그간 발굴된 행궁터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데다가 국립공원 내에 위치해 후대에 훼손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덕분이다. 김성태 경기문화연구원 팀장은 “조선후기 장인들의 손으로 만든 원형이 대부분 보존돼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건축물까지 복원되면 수려한 북한산의 생태와 함께 향후 훌륭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1차 발굴조사를 마친 조사단은 내년 봄까지 외전영역에 대한 2차 발굴조사를 진행한다. 현재 발굴조사는 행궁터 복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향후 5차까지 예정된 조사가 마무리된 후에는 연구 자료에 의거해 건물복원까지 추진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