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운영하는 서당에는 멀리 수원에서 공부하러 오던 화가 한 분이 있었다. 그 화가는 배우고 싶은 열의는 간절했지만 여건이 안 되어 공부를 중단한 것을 매우 아쉬웠었다. 그 뒤 소식이 끊긴지 3~4년이 지났는데, 작년 겨울 문득 그 화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화가는 서울의 문래동에 작은 갤러리를 열었으니 꼭 한번 놀러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개인전을 초대하고 싶으니 와서 보고 결정하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나는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해도 바뀌고 두어 달이 지나갔다. 그러자 그 화가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우선 예술가들을 위한 강의부터 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문래동에 있는 ‘갤러리 두들’에서 ‘노자 미학’을 강의하게 되면서부터 문래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문래동 전철역 7번 출구를 나서서 조금 걸어가자 ‘문래창작촌’이란 안내판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늦추위에 가지를 떨고 있는 가로수와 문 닫힌 녹슨 철공소 셔터 등이 나의 눈에는 삭막하게 다가왔다. “뭐, 이런 곳이 예술인들이 모여 산다는 곳이야?”하는 생각도 들었다.

 ‘갤러리 두들’ 또한 허름한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사람이 겨우 오를 수 있는 시멘트 계단을 올라 들어선 조그만 갤러리는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왠지 정감이 가는 갤러리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문래동에 발을 들여놓다 보니 개발이 멈춰선 골목길 구석구석에 살고 있는 창작촌 사람들의 사람 사는 이야기와 예술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몇몇 작가를 만나보니 골목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옛 고향의 동네사람들처럼 작가들은 따스한 정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오로지 철공소만이 밀집되어 삭막하던 이곳이 현재처럼 철공소뿐만 아니라 예술 공간이 동거하는 형태의 모습을 갖춘 것은 2000년도 초부터였다고 한다. ‘샤링 골목’으로 일컬어지는 이 지역이 IMF 구제금융을 거치면서 쇠락하기 시작하자 대형 철공소들은 시화공단 등 지방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개발되지 않은 이곳은 여전히 70~80년대의 모습으로 섬처럼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비싼 임대료를 피해 홍대와 신촌을 나온 젊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현재처럼 철공소와 예술 공간이 공존하며,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노동자와 예술가들이 어울리는 독특한 동네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예술가들이 버려지다시피 한 건물 벽 곳곳에 손수 그림을 그려 넣게 되자 죽었다고 생각되던 골목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마치 폐허 같았던 공간은 산뜻한 문화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이렇게 바뀌기 시작하더니 현재는 약 200여명의 예술인들이 작업 공간 100여 곳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꼭 초대전을 열고 싶다는 청에 못 이겨 가을에 평생 처음으로 개인전까지 열게 되면서, 그 동네에 사는 분들을 좀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다들 서로의 예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일처럼 좋아라하는 것이 마치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들의 천진스런 행동과 같았다. 옥상에서 달과 별을 보느라고 저녁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계산서에 넣지 않은 채 안주를 계속 내오는 가게 술집 주인도 있었다. 이런 일이 별스런 일은 아니었지만, 아련히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데는 충분히 따스한 삶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슬럼화 되던 동네를 예술 마을로 바꾼 것은 예술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음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고양시에도 ‘문래창작촌’처럼 문학과 예술이 실생활 속에 녹아나는 동네가 하나 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김백호 회산서당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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