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명륜대학 개교 15주년 기념 유적지 답사
고양향교(전교 이영찬)에서는 지난달 30일 고양명륜대학 개교 15주년 기념으로 성현의 유적지 답사를 실시했다. 내 고장의 성현들의 얼을 기리고 그들의 후예됨을 자랑으로 삼고자하는 의미의 답사였다.
이날 답사에는 한익수 전 고양시씨족협회장, 이재곤 초대 고양명륜대학총동문회장, 강홍강 행주서원원장, 이충구 충장사제전위원장, 정선용 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김보연 전 도의원, 최경순 공양왕릉제전위원장, 김백호 단일문화원장, 고양향교 장의 등 70명의 고양지역 원로어르신들이 참석했다.
이날 답사한 유적지는 유항 한수 선생 묘역, 고양팔현 사재 김정국 선생 묘, 허준 선생 묘 등이었다. 이들 성현들의 묘는 모두 비무장지대(DMZ)내 남방한계선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에게 개방을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고양향교는 답사신청자 예약을 받아 보병 제1사단의 허가를 득한 후 답사일정을 진행했다. 답사 신청자는 버스 2대에 나누어 타고 고양시를 출발해 파주시 임진강 전진교에 도착, 검문소에서 도강 수속을 마친 후 어렵게 답사를 진행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도착한 곳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의성 허준(1539~1615)의 묘이다. 이날 답사는 양천 허씨 문중 대표가 동행해 안내해 주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인 허준 묘역은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있다. 허준이 1610년 쓴 ‘동의보감’은 보물 제1085호인 한의학서로 2009년에 세계문화(기록)유산에도 등재 됐다. 허준 선생 묘는 재미 고문서연구가인 이양재씨와 방송국이 양천 허씨 족보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1991년 9월 30일에 발견했다고 한다. 허준 선생 묘는 쌍분으로 묘비 1기, 문인석 2기, 상석, 향로석이 있다. 상단에는 허준의 생모로 추정되는 묘 1기가 더 있다. 의성 허준 선생은 역대 의학자들의 전기인 ‘의림촬요’에서 ‘본성이 총민하고, 의학에 대한 조예와 신묘함이 깊은 데 이르렀다’고 기록한다. 선생의 천재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불멸의 업적인 ‘동의보감’은 86종의 수많은 의서를 참고해 14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특히 향약(鄕藥) 637개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해 백성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편찬했다. 따듯한 봄의 기운을 만끽하며 찾은 민통선(DMZ) 허준 선생의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포근해 보이지만 우리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하다. 그래서 일까? 문득 불후의 역사가 사마천이 떠오른다. 왜일까?
성리학 맥통 이은 한수 선생 묘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고려시대 문신 한수(1333~1384) 선생 묘역이다. 한수 선생의 본관은 청주, 자는 맹운, 호는 유항이다. 묘는 쌍분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묘제와 석물을 볼 수 있어 2003년 경기도기념물 제187호로 지정됐다. 남방한계성 경계지점에 있는 유항 선생 묘역에 도착한 일행은 준비해간 간단한 주·과·포로 성묘의 예를 올리고, 유항 선생 20세손 한익수 전 고양시씨족협의회장으로부터 가문에 전승되는 비사를 명쾌한 해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유항 선생은 유시(어려서)부터 영민해 이제현 선생에게 글을 배웠으며 15세에 대과에 급제했고, 후에 대제학이 되었으며 왕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유항 선생은 청난(淸蘭)처럼 맑고 겸양이 넘치는 경(敬)사상으로 평생한 유학자요, 성리 학자였다. 성리학(주자학)은 안향 선생이 최초로 받아들인 후 백이정에 의해 연구되고 체계화됐다. 성리학은 이후 이제현을 통해 목은·유항·포은으로 이어졌고, 조선 초기에는 권근과 변계량을 통해 발전됐음을 알 수 있다. 유항 선생은 한때 한천서당에서 강학했으며 후일 한천사에 안향·권보·이색과 함께 배향됐다. 유항 선생을 가리켜 목은 선생은 ‘어름처럼 청아하고 갑(匣)속에서 꺼낸 거울처럼 맑은 분’이라고 칭송했다. 선생의 높은 학문과 아름다운 행의는 사림의 모범으로 추앙됐으며, 선생의 공평무사 원칙에 일관한 청렴한 정사는 당시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됐다.

세 번째로 답사한 곳은 고양팔현의 한사람으로 조선조 성리학자 사재 김정국(1485~1541) 선생 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선 길이 너무 좁아서 차량 진입과 주차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다. 큰일이었다.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차량을 세워 놓고 필자를 비롯한 젊은 유림 몇 명은 사재 선생의 묘를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묘역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봄에 개사초를 한 것 같다. 불안한 마음은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일행은 신도비에서 촬영을 마치고 김정국 선생 묘소를 찾았다. 그렇지만 포·혜·과 없이 단잔으로 배례하고 성묘를 마쳤다. 감회에 젖을 시간도 없이 하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잊지 못 할 아름다운 만남의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가르치지 않고 형벌하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사재 김정국 선생은 성종 16년에 태어나 중종 36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조선조 사림파 유학자의 한사람으로 중종조의 정치와 교육 및 학문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조선 ‘선비정신’의 전형을 보인 김굉필에게 수학했으며,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통해 도학적 경세의 필요성을 주장한 학풍 또한 김굉필, 김종직으로부터 연원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생을 책과 함께하면서 도에 의한 품격과 봉공의 의리를 실천하는 소유자가 바로 선비의 필수불가결 요건이었던 것이다. 고양팔현중 한 사람만 대표해서 기술한다면 조선조의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사재 김정국 선생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는 고양팔현을 비롯한 수많은 선현들의 아름다운 행적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번 답사를 통해 성현들의 현철한 가르침은 도시와 농촌, 과거와 현대를 뛰어넘는 참다운 삶을 위한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천년 신라의 패망 서린 경순왕릉
마지막 답사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릉이었다.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송두리째 넘겨준 경순왕의 묘는 DMZ 남방한계선인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위치하고 있다. 경순왕은 927년 후백제 견훤의 광포한 공격으로 경애왕이 시애된 후 견훤의 비호를 받으며 왕이 되었다. 그 아들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천년 사직을 가벼이 넘겨줄 수 없다”며 항복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죽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항복했다. 경순왕은 왕건의 부마로 살면서 한시대의 종말을 지켜본지 43년 후 세상을 떠나 ‘경순’이라는 시호를 받고 이곳에 묻혔다.
경순왕릉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가 조선 영조 때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신라의 왕도인 경주 지역을 벗어나 타지역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그 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방치되었던 능을 1975년에 찾아 사적으로 지정, 정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패망한 나라의 왕이 지닌 한과 설움을 누구도 가늠할 수 없듯이 경순왕릉은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산야에 천년의 비바람을 견디며 쓸쓸히 누워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시대의 종말을 지켜봐야만했던 슬픈 왕좌의 주인이자 일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겨준 경순왕, 그리고 고려 500년 역사의 마지막을 지켜봐야했던 공양왕 그들은 죽어서도 돌아갈 수 없는 왕도를 그리워하며 홀로 잠들어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