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고속터미널 화재사고 피해자 박성린 교사

 

▲ 대안학교 미술교사로 고1학생과 함께 사고를 당했던 박성린 교사(사진 왼쪽). 간병과 협상을 함께 이겨낸 아내 송은영씨(사진 오른쪽)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닫힌 문틈에서 연기가 나오는 게 보였다. 얼마전 받은 민방위교육에서 대형화재사고 유형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민지의 손을 잡고 바로 뒤로 돌아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역으로 뛰어올라갔다. 순간 펑하고 폭발이 일어나고, 강한 열기가 느껴졌다. 칠흙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꼭 잡고 있던 민지의 손을 놓치면서 나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5월 26일 8명의 사망자와 5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고양고속터미널 화재사건. 세월호 전후로 각종 안전사고가 이어지면서 고양고속터미널 사건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삶을 달리한 사람과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사건은 그 전과 후를 나누는 엄청난 전기가 된다.

전신 35%, 3도 화상 입어

▲ 박성린 교사는 당시 상황을 그림으로 설명해줬다
당일 고양고속터미널에 제자인 민지양(가명 17세)과 함께 전신 35%, 3도 화상을 입은 박성린(39세) 교사. 대안학교 교사인 박 교사는 당일 학생들과 강화로 캠프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박 교사는 다른 학생들보다 일찍 도착해 민지양과 지하에 있는 약국으로 약을 사러 가던 참이었다. 유독가스를 발견하고 1분, 돌아나와 뛰면서 정신을 잃기까지 5분은 지금 생각해도 참 엄청난 순간이었다.

박 교사는 민지가 약국을 가자는 이야기에 같이 손을 잡고 지하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의 두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아래쪽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순간 박 교사는 위험을 직감하고 민지의 손을 잡고, 계단을 거꾸로 올라갔다. 그리고 폭발. 사방이 깜깜해졌고, 민지는 박 교사의 손을 놓았다. 박 교사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혼자 에스컬레이터 밖에 누워있었다. 기어서 밖으로 빠져나온 박 교사는 바로 소방관에게 구출됐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정신을 잃은 민지는 지하1층의 구조물 뒤에서 발견됐다. 구조를 나온 소방관이 민지의 다리를 보고 구출할 수 있었다.

같이 있던 주부는 결국 사망

“다음날 부천병원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습니다. 민지부터 찾았죠. 다행히 건너편 침대에 있더군요. 민지 손을 놓친 것이 그 와중에도 계속 걸렸는데.”

박 교사의 눈이 촉촉이 젖는다. 나중에 민지에게서 일부러 손을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 뛸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박 교사가 위험해질 것 같아 그랬다는.

“민지가 그때 같이 있던 아주머니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더라구요.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도 민지와 함께 있어 치료과정을 참아내기 더 나았던 것 같아요.”

박성린 교사는 당시의 상황보다 이후 치료과정의 고통이 더 컸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붕대를 걷어 자신의 화상과 이식 부위를 보여줬다. 가방을 멨던 등 일부를 포함해 다리와 엉덩이, 허벅지 부위가 모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앞다리와 가슴 쪽의 피부를 떼어내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내 길게 늘려서 화상 부위를 이식했다. 처음 화상을 입은 부위에 죽은 사람의 살을 덮어놓는 사체 피부이식 1번에 피부이식 수술 3번. 박 교사의 살 전체에서는 허물이 허옇게 벗겨지고 있다.

 ‘빨간 도마뱀’같은 등과 다리

그래도 처음 호흡기를 끼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 중환자실에서 화상의 고통 때문에 환각에 시달릴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살 것같다’고. 살만하니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

“고속터미널도 사고 과정이 세월호 사건과 똑같이 어이없죠. 소화전도 아무도 안누르고. 일하던 사람들은 그냥 도망가고. 그때 상황을 보면 아이들은 일찍 와서 광장에서 놀고 있었어요. 날씨는 정말 좋고.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죠. 저희가 지하에 내려가서도, 폭발이 일어날 때까지 화재경고도 울리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도 정상작동했으니까요.”

박 교사는 화상치료가 22일 끝나고 재활의학과로 옮긴다. 내년 1학기에는 학교로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학생들이 보내준 동영상과 편지가 큰 힘이 되었다. 힘내라고 춤추고, 쇼를 하는 동영상을 찍어 보냈는데 보면서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고통을 이겨냈다.

“제 살을 보면 빨간색 도마뱀같아요. 그래도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어 살아났구나 싶습니다. 그동안 별로 양심적으로 살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더 재미있게 살아야겠어요.”

박성린 교사의 사고로 아내 송은영(40세)씨와 양쪽 부모들 모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박 교사의 팔순 아버지와 어머니도 소식을 듣고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했고, 지금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세월호 등 안전사고 ‘깊은 공감’

“사고처리와 간병, 협상까지 혼자는 못했을 일이에요. 지난 일요일이 사고난 지 49일이 된 날이죠. 돌아가신 분들 49제를 지냈어요. 항상 사고 나고 말하는 얘기지만 사고가 일어나면 몇 배의 비용과 돌이킬 수 없는 고통, 상처가 남죠.”

한시름 놓고 나서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송씨는 함께 해준 유가족들과 부상자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 안쓰러움을 표했다. 아직도 뇌사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양고속터미널 매표소 직원과 그 가족들을 이야기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민지를 발견한 소방관분들과 우리 남편을 구해준 능곡119출장소 이수경 반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요. 신속한 응급처치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송씨는 능곡소방 출장소에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찾았다고 소방관들이 스스로 구입하는 장갑 한 켤레가 35만원이나 된다는 걸 알고 놀랐다며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기도 했다.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함께 챙기며 긴 터널을 슬기롭게 지나고 있는 박성린, 송은영 부부. 세월호 사건 등 다른 안전사고 대책위원들과의 연대 활동에도 적극 나서겠다는 두 사람. ‘장하다’ 싶지만 다시 이런 일들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하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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