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램프는 농부의 오두막에서 빛난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1월 23일까지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키워드로
아시아의 근대와 현대 되돌아봐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은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 깊은 사람들을 만난다.
이 생각 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
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의심을 찬양함’(1932)에서 발췌
국가가 나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을까?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를 생생하게 지켜봤던 우리들은 모두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의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과, 여전히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자기의 머리를 옆으로 흔들며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사람들로 분열된 채 2014년을 통과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냥 당연시 하면 안 됩니다. 시민들은 권력에 대해 항상 의심해야 합니다. 늘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죠. 80여 년 전에 쓰인 브레히트의 시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마치 눈앞에서 들여다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11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난 박찬경 예술감독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를 1년 반 동안 차분히 준비했지만 “정작 개막을 몇 개월 앞두고 터진 세월호 참사의 충격으로 전시 준비를 하는 것이 무척 어렵고 힘들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미디어아트로 가로지른 귀신, 간첩, 할머니
2000년에 시작되어 여덟 번째 맞는 ‘미디어시티서울2014’전. 지난 1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올해 전시는 아시아를 화두로 하고 있다. 작품을 이어주는 키워드는 ‘귀신, 간첩, 할머니’이다.
박찬경 감독은 “아시아는 혹독한 식민과 냉전 경험, 급속한 경제성장과 사회적 급변을 공유해 왔다”고 말했다. ‘귀신’은 그 과정에서 버림받은 아시아의 역사와 전통, ‘간첩’은 냉전과 식민의 아픈 기억, ‘할머니’는 귀신과 간첩의 시대를 견뎌온 여성의 삶과 시간을 상징한다.
“신(神)은 받들어야하지만 귀(鬼)는 멀리해야 해요. ‘미션임파서블’ 같은 영화 속의 스파이는 매력적이지만 현실 속 ‘간첩’은 무섭죠. 할머니는 공경 받아 마땅한 존재지만 젊음의 찬양 밖으로 추방되고 맙니다.”
박 감독은 “이들은 가끔 눈에 띄기도 하지만, 쉽게 보기 힘들거나 보아서는 안 되거나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역설적인 존재”라며 귀신, 간첩, 할머니를 전시로 진입하는 세 안내자로 삼아서 전시관 곳곳에 미디어아트로 구현된 작품들을 감상하라고 권했다.
마음 가는 작품 찾아 몰입하는 즐거움
이번 전시에는 17개국 42명(팀)의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하여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현주소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많은 작품들을 어떻게 한 번에 다 볼 수 있을까? 박찬경 감독은 “모든 작품을 다 보려고 하지마세요. 왠지 끌리고 마음이 가는 작가나 작품을 골라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그의 말대로 전시장을 둘러보니 작품에 몰입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1층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설치된 양혜규 작가의 ‘소리 나는 조각’을 만났다. 소리는 수많은 고대 신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태초의 시작을 나타내고, 방울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공명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베트남 작가 딘 큐 레는 14개의 프랑스 가구로 제작된 <바리케이드>라는 작품을 통해 2005년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이민자 폭동 사태를 통해 식민주의에 맞서 싸운 투쟁의 유산을 되돌아보며 ‘아시아의 진정한 해방과 독립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2층 전시장은 일제 강점기의 탄압과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미신 취급을 받았던 한국의 무속 신앙의 원형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긴 김수남 작가의 사진작품과 김인회 교수의 동영상 작품도 볼 수 있다. 고양시의 ‘일산 정발산 말머리 도당굿’도 영상으로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었다.
3층에서 단연 눈과 귀를 사로잡는 작품은 영국작가 미카일 카리키스의 ‘해녀’이다. 그들은 여덟 살부터 ‘숨비소리’라는 전통적 숨쉬기 기술을 익힌다.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진주와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해녀들의 일상 속 삶과 죽음을 시청각 설치물로 표현했다.
죽을 것인가 vs 죽임을 당할 것인가
1층 전시장의 양쪽 끝에 전시되고 있는 리나 셀란더와 니나 피셔의 작품은 각각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근대 문명과 아시아 자본주의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형 원전 사고.
그 후에도 우리는 아무런 대안 없이 “어쨌거나 우리 모두는 죽는다. 하지만 죽임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 죽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라고 무기력하게 항변하며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연방이 국가 전체의 전기화를 통해 꿈꾸었지만 실패해버린 유토피아에 대한 미련처럼,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욕망도 결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레닌의 램프는 농부의 오두막에서 빛난다”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SeMA), 한국영상자료원(KOFA)
관람료 무료관람
문의 서울시립미술관 02-2124-8800 www.mediacityseoul.kr/2014/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