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닮은 우리 부부 이야기 이필윤·김경희 부부

“사실 우리만의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게 쑥스럽잖아요. 지금도 그렇긴 한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우리 인생을 훑어보는 계기가 됐네요. 그런 의미에서 감사해요.”

이필윤(50세), 김경희(49세) 부부의 이야기를 취재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남편인 이씨가 ‘뭘 그런 걸’하며 거절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아내의 제안도 있었지만 매일이다시피 어울리는 동네 ‘중산의 노는 동네사람들(중노동)’ 멤버들의 권유에 굴복했다고 한다. 어색한 표정으로 고양시 시의원인 아내 김경희씨와 함께 중산동 단골식당인 주문진에 나타난 남편 이필윤씨. 맑은 소주 한잔에 23년 결혼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얼굴에는 추억이 가득하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우리 부부가 ‘무려’ 23년을 살았다고 올렸더니 ‘왜 무려냐’고 타박을 하더군요. 이 사람하고는 한 살 차이인데 사실 저희는 CC예요. 컴퍼니 커플요.”

▲ 23년을 서로 바라보고 살아서일까. 웃는 모습마저 꼭 닮은 이필윤·김경희 부부.

회사 동료와 아내 놓고 경쟁
이필윤·김경희 부부는 직장에서 처음 만났다. 컴퓨터 회사였는데 남편은 수입유통, 아내는 컴퓨터 프로그램 부서에서 일했다.

“부서 통합 때문에 같이 일하게 됐어요. 이 사람이 제 앞자리에 앉았는데 업무하는 모습을 흘깃흘깃 쳐다보고는 했죠. 그때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이 예뻤어요. 남자들의 로망이랄까. 그런데 직장 선배와 이 사람 이야기를 했는데 서로 ‘나 김경희 좋다’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때부터 경쟁심이 생겼죠.”

이씨의 얼굴이 수줍게 변했다. 아내에 대한 호감에 경쟁이 더해지며 그때부터 ‘작전’이 시작됐다. 술자리에 자주 부르고, 눈에 안 띄게 잘해주려 애썼다. 25, 26살 청춘남녀의 연애가 그렇게 시작됐다. 보수적인 김씨를 안심시키고 만나기 위해 커플 모임도 만들었다. 세 커플이 자연스럽게 모여 술도 먹고, 이야기 나누면서 사람들은 두 사람을 ‘공인 커플’로 인정하게 됐다.

결혼식 작전 성공 ‘가장 행복해’
‘굳히기’를 위해 이씨는 아버지를 졸라 차를 샀다. 당시 이씨의 집은 역삼동, 회사는 강남, 김씨의 집은 노량진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이씨는 노량진과 강남을 부지런히 오갔다. 여느 연인처럼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다 29, 28살에 결혼을 했다.  “여러 번 헤어졌는데도 이 사람이 변함이 없었어요. 연애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구요.”

결혼하던 날을 이씨는 ‘가장 행복했던 날’로 꼽았다. 오랜 작전,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결혼 후 시댁인 역삼동에 15개월을 들어가 살았다. 남편이 ‘잠시 시댁에서 살았다’하니 아내가 손사래를 치며 “정확히 15개월이었다. 잠깐이 아니었다”고 정정을 해준다. 역시 시댁살이는 모든 며느리들에게 같은 느낌인가 보다.

첫 아이가 생기고 분가를 하게 됐다. 서울 창신동 꼭대기 신축 전세아파트에서 둘만의 살림이 시작됐다. 그런데 아내에게 자궁근종이 발견됐다.



아이 크기만한 근종에 눈물 펑펑
“임신하면 안되는 거였는데. 수술을 할 수 없어서 아이와 근종을 같이 키웠어요.”

아내 옆에서 남편이 당시 상황의 기억을 전해주었다. “수술 동의가 엄청 복잡했어요. 출산과 근종 수술을 같이 해야하니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아이 크기만큼 자란 근종을 보고 울고, 근종에 눌린 아기의 발을 보고 또 울었다. 그 아이가 커서 군대에 가고, 얼마 전 제대를 했다.

“둘째 낳고 일을 그만 뒀어요. 아이들 돌 지나면 다시 나가야지 하다가 7년 전업주부를 했어요. 그때 너무 힘들었어요. 온세상은 다 앞으로 나가는데 나만 뒤로 물러나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주부 우울증을 앓았던 모양이다. 특히 큰아이에게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1999년 고양시 중산동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아내는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운전면허도 따고, 학교 방과후 컴퓨터 강사일도 시작했다. “너무 좋았다.”

아내가 돌파구를 찾는 동안 남편에게는 위기가 찾아왔다. IMF 직전 미국 파견근무를 나가게 된 이씨는 “돌아오면 내 자리가 없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IMF 구조조정 직격탄을 맞고
“미국에서 이민 준비를 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불렀어요. 그런데 출입국 관리소에서 큰 가방을 든 젊은 여자가 아이 둘을 업고 나오니 불법 이민자 취급을 한 거예요. 아내는 미국 이민이 자신없다고 하더군요. 결국 그대로 한국에 다시 돌아와 구조조정 한파를 맞았죠.”

남편은 사업을 시작하고, 아내는 일을 늘려갔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위기를 대처하는 부부는 지혜로웠다.
“큰 애 7살, 작은 아이 5살 때부터 저녁 9시쯤 둘만의 시간을 가졌어요. 애들을 재우고 근처 카페에서 맥주 한두 잔 하며 이야기를 했어요. 거의 매일 두세 시간씩.”

아내의 우울과 부부 관계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고 대안을 제시한 것은 역시 남편 . 그렇게 부부는 연애 시절 이상으로 지역의 공인 ‘닭살 부부’가 될 수 있었다. 

때마침 함께 참여한 노사모 모임. 정치적으로도 부부는 동지가 됐다. 개혁정당 활동은 남편이 먼저 시작했지만 뒤늦게 출발한 아내는 학교 강의를 그만 두고 총선 지원 활동을 했다. 

아내 출마에 처음엔 화 내
“정당 내에서 지역정치, 지방선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어요. 갑자기 동네에서 우리 아내한테 나가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버럭 화를 내며 “다시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을 같이 하는 동네 사람들의 거듭된 부탁에 이씨는 “아내가 하겠다면”으로 물러섰다. 아마 내심 아내가 거절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내 김경희씨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처음 시의원이 됐다. 4년 후에는 식사·중산·정발산·풍산·고봉동을 지역구로 재출마해 당선됐다. 2010년, 2014년 이어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3선 의원이 되자마자 시의회 의장으로 거론될만큼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잘하고 있다고 평가해요. 남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저 걱정은 건강이죠. 갑상선 수술도 받고 했으니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해요.”

이쯤 되면 눈을 좀 흘겨줄 만하다. 요즘 남편은 살림을 맡아한다. 자칭 ‘이 주부’. 대학생인 아들과 입시 준비 중인 둘째 딸, 아내의 아침 밥상을 매일 차려준다. 딸의 도시락도 그가 싼다. 어제 싸준 멸치볶음을 엄청 맛있어 했다는 딸 이야기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물론 말하지 않은 위기는 더 많았다. 큰아이 사춘기 때 맘 졸이던 이야기, 작은 딸이 재수를 결심하던 때, 민원·갈등으로 속상해하는 아내를 보는 일. 그때마다 서로가 함께 위로하고, 슬퍼하고, 기뻐했다.


“제가 정말 고마운 건 어디를 가나 이 사람이 저를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남자한테는 가장 큰 찬사죠.” - 남편

 “23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국 이민 가기 싫다고 한 것 후회가 되죠. 앞으로는 당신 하자는 대로 다 하겠다고 그랬어요.” -아내

인터뷰 내내 ‘닭살’돋는 부부에게 심술이 나서 ‘서로에 대한 아쉬움’이 뭐냐고 물었다. 아내는 “임신 때 과일을 한 번도 안 사준 일”, 남편은 “없다”고 한다. 

부부는 이제 곧 독립할 아이들에게 부부만의 미래를 다짐받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둘만의 시간으로 갖겠다고 한다. 많은 시간이 흘러도 부부는 이렇게 선한 웃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겠지. 남편은 아내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아내는 남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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