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men Cross DMZ 진행한 여성신학자 현경 교수


지난 5월 24일 국제여성평화운동가 30명이 남북 분단의 상징인 DMZ를 육로로 통과하는 ‘Women Cross DMZ’ 행사가 열렸다. 세계적인 여성 평화운동가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비롯해 라이베리아의 리마 보위, 아일랜드의 메어리드 매과이어 등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함께 동참했던 이번 행사는 통일과 평화 운동에 대한 작지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행사로 평가받았다. 이 행사를 실질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했던 현경 교수가 고양평화누리 초청으로 고양시를 찾았다. 행사의 후속 일정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특유의 활기찬 에너지를 유지하고 있는 현경 교수를 만나 Women Cross DMZ 행사의 뒷이야기와 여성성에 기반한 평화운동에 대한 독특한 전망을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7월 2일과 3일 양일간 아람누리와 출판사 열림원 사옥에서 이뤄졌다.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정서의 여성평화운동
남한에서의 종북 시비는 전혀 예상치 못해
정치 리더들이 주도하는 평화 믿을 게 못돼
지속가능 평화는 국민들로부터 솟아올라야
내년 남에서 북으로 DMZ 거슬러 오를 것


Women Cross DMZ 행사를 기획한 이유를 듣고 싶다. 
모두가 느끼다시피 한반도를 잠시 비추었던 햇볕정책이 다 끝나고, 남과 북 일체의 소통이 전면 중단된 상황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답답한 현실 속에서 리더들이 만드는 평화가 아니라 일반 여성들이 만드는 평화의 발걸음을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에서 시작해보고 싶었다. 행사를 구상하며 세 가지 모토를 정했다. 첫째,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 둘째, 이산가족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자. 마지막으로 유엔 안보리 1325호 조항, 온세계 모든 평화 운동의 과정에 여성을 참여시키자는 권고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기존의 평화운동과 다른 점은.
한마디로 여성성이 중심이 되는 평화운동이다. 지금까지의 평화운동은 주로 남성성이 주도하는, 거시적이고 구조적이고 결과 중심적인 운동이었다. 그에 반해 여성 중심의 평화운동은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정서에서 출발한다. 보통 사람의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통일이라는 커다란 의제와 일상 속의 평화운동이라는 모토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고정 관념을 깨는 상상력이다. 이번 행사에 힘을 보탠 세계적인 여성 평화 운동가들이 겪어낸 경험과 지혜가 바로 그런 상상력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행사 준비 과정에서 남한 정부나 언론과는 상대적으로 사전 접촉이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남한 정부측과의 협조 문제는 걱정도 안 했다. 대통령 자신이 여성이고, 담화문을 통해 ‘통일은 대박’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판문점을 건너 남한으로 넘어간다고 하면 당연히 팔 벌려 환영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반면 서방세계에 미지의 영역으로 인식된 북한이 문을 열어줄 것인가는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북한에 먼저 가서 문을 두드려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북측은 민간적 성격의 조직인 ‘세계인민과 함께하는 연대성위원회’를 이번 행사의 파트너로 지정해서 모든 절차를 조율할 수 있도록 했다. 판문점을 걸어서 건너는 것도 어렵잖게 승인이 났다. 그런데 남한 당국에서는 의외로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판문점을 통과해 내려와도 체포하지는 않겠다’는 게 남쪽 당국으로부터 들은 유일한 입장이었다. 이게 도대체 예스야, 노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행사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고자 청와대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아쉽게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일부 종교계와 여성운동 진영에서 우리 행사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밝혀주셔서 힘을 낼 수 있었다.

고양시로부터 연계 제안이 들어온 건 언제였나.
행사 한 달전쯤에 고양시에서 평화통일특별시 선포식에 우리가 참여해서 격려를 해달라는 제안과 함께 Women Cross DMZ 행사를 부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정말 반갑고 고마웠다. DMZ에 인접한 100만 도시인 고양시에서 우리 프로그램을 응원해 준다는 게 큰 격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우리 팀의 평양에서의 일부 언행을 남한의 보수 언론이 문제를 삼고 나섰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하루아침에 소위 종북 논란의 주인공들이 돼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고양시와의 행사 연계도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대가 컸던 만큼 많이 섭섭했다. 남으로 넘어오면서 그 일이 가장 큰 부담이기도 했다.

‘Women Cross DMZ’ 행사에 함께한 사람들.  

예상치 못한 종북 논란을 겪으며 어떤 생각을 했나.
세상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사들이 어떻게 특정한 정파의 이익을 추종하는 종북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남한이라는 울타리 안과 밖의 감각의 차이를 절감해야 했다.
나만 해도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보니 보수진영이 휘두르는 종북몰이 프레임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사전에 그런 염려를 귀띔해주는 분들도 있었지만 우리가 아니면 됐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그런 고려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부에서는 이번 행사가 구체적인 성과가 미미한, 일회성 퍼포먼스라는 지적도 있는데.
시각의 차이다. 어떤 운동에는 유형의 성과만이 아닌 무형의 성과가 있게 마련이다. 세계적인 여성 운동의 리더들이 북녘땅에 들어가 북한의 보통 여성들과 만나서 그들이 겪은 전쟁의 상처가 무엇인지를 그들의 목소리로 듣고, 서로를 보듬어 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행위가 파생하는 의미들을 어떻게 가시적 성과의 유무로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문제를 일으킨 패러다임으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더 큰 패러다임으로 들어가야 기존의 패러다임이 봉착한 문제를 비로소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더 큰 패러다임이 바로 여성 평화운동의 힘인 생명, 모성, 살림의 영성이라고 본 것이다. 여성 평화운동을 하며 체득한 깨달음이 있는데, 정치적 리더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주도되는 평화는 별로 믿을 만 한게 못 된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햇볕정책이 얼음장정책이 되는 것을 보라. 지속 가능한 평화는 국민들에 의해 밑에서부터 솟아올라야만 가능하다. 어떤 운동이든 처음 시작하려면 엄마가 아이를 낳아서 키우듯이 해야 하는 것 같다. 여성평화운동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태어나 젖을 먹는 아기에게 왜 밥을 못 먹느냐, 왜 일어서지 못하냐고 성급하게 다그쳐서는 안된다.

이번 행사의 의의를 정리한다면.
분단 70주년의 해에 수많은 평화대회가 기획되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무력하게 무산되었다. 오직 Women Cross DMZ만 행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관계 당국이 이렇게 저렇게 입장을 바꿀 때마다 우리는 여성의 방식으로 유연하게 새로운 출구를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 60년이 넘도록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정전 협정의 현장에서 남과 북, 그리고 세계의 여성들이 함께 평화를 노래할 수 있었다. 우리의 통일은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성들의 감성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벽에 작은 틈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여성 특유의 유연함으로 마치 물처럼 그 틈 사이로 스며들어 원수가 된 마음을 녹여내고 그 녹아냄의 자리에 용서의 씨를 심을 것이다. 

내년 행사는 어떤 그림인가.
내년에는 방향을 남에서 북으로 DMZ를 가로지를 것이다. 이를 위해 국제팀을 새롭게 꾸리려 한다. 아시아 여성 평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의 합류도 추진 중이다. 우리가 행사 날짜로 잡은 5월 24일은 ‘세계 여성 비군사화데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행사를 매년 개최할 예정이다. 차후에는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주변 국가인 중국, 일본, 타이완 등에서 남북 여성들이 만나도 좋겠다. 참가 여성들의 직업을 특화해보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평화를 위한 여성 간호사 모임, 여성 과학자 모임, 여교사들, 여성 음악가들…. 이런 방식으로 여성의 감각으로 고민하는 평화통일의 담론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고양시의 평화통일특별시 운동에 아이디어를 준다면.
정치적 계산을 넘어서는 문화운동으로 펼쳐나갔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고양시에서 전 세계의 언론매체를 모아놓고 남북한 어린이 합창단이 반달, 고향의 봄, 찔레꽃과 같은 분단 이전의 동요들을 함께 부르는 콘서트를 여는 거다. 그 노래속에 들어있는 정서는 분단이라는 트라우마가 없었던 시절의 정서니까. 조금만 시각을 열어서 상상력을 펼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정말 많다. 판에 박힌 듯 사람 많이 동원하고, 뭔가를 선언하는 식의 과시적인 행사들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남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예술적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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