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 도래울마을에 기념관 건립
‘문정공 석탄 이신의 선생 기념관’ 개관식이 지난 28일 도래울 마을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전라도에서 새벽에 출발해 올라온 전의이씨 문중 종원(회장 이재만) 200여 명과 최성 고양시장, 방규동 고양문화원장, 이영찬 고양향교 전교, 한익수 고양씨족협의회 명예회장, 이은만 문봉서원장, 강홍강 행주서원장, 이세준 용강서원장을 비롯해 많은 내빈이 참석했다. 탤런트 이한위씨도 후손으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후손들, 도래울마을에 기념관 건립
‘자랑스러운 고양인’에 선정되기도
임진왜란 때 붓 꺾고 의병 모아
석탄 이신의 선생의 후손들은 고양시 도내동 도래울 마을이 개발되면서 받은 보상금 35억원을 들여 선생의 생가인 양소당과 기념관을 건립하는 뜻 깊은 일을 추진했다. 기념관은 학문관, 의병활동, 목민관, 문학관 등의 전시공간으로 이뤄졌고, 기념관 인근에 선생의 사당인 충의사와 생가인 양소당, 선생의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이재만 회장은 “국가와 주군 밖에 모르는 분이셨던 이신의 선조님의 얼을 후손에게 심어주고 이 일을 기점으로 후손들이 화합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우리 후손들이 마음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해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이 일에 종원들께서 합의해주시고 따라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일 했다고 하는 말들을 하시는데, 우리들은 응당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앞으로 학생 중심의 교육사업을 통해 석탄 할아버님을 현창하는 일을 고양시와 의논해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구도와 수신에 집중했던 고양8현
2012년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돼 학술발표회를 갖기도 했고, 선생의 시비를 행주산성 선착장 공원에 세우기도 했던 석탄 이신의 선생. 고양8현 중 한 분이며, 문봉서원에 배향되신 이신의 선생은 어떤 분인가?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을 본관으로 하고 고려 개국공신인 이도를 시조로 하고 있는 전의이씨인 석탄 선생은 1551년 명종6년에 형조참의를 지낸 원손과 정종의 현손인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고양8현의 한 분인 민순 선생의 문인이 되었고, 예학의 거두인 김장생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청년 시절, 석탄 이신의 선생은 성리학자로서 치국의 도리를 알고 그 능력과 품성을 갖춘 연후에 현실정치에 도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벼슬에 나아가고 안 나아가고는 때를 만나고 못 만나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관과 경세관은 스승인 습정 민순의 영향을 받은 바 컸다.
과거를 통한 관계 진출을 거부하고 구도에 힘쓰던 그는 34세(1584년)에 스승인 행촌 민순의 권유로 2년여간 관직에 나갔다가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현실화하기 위한 준비가 덜 된 것으로 인식하고, 구도(求道)와 수신에 집중하고자 했다. 향촌에 묻혀 지내면서 『대학차록(大學箚錄)』과 『가례차록(家禮箚錄)』을 짓는 등 학문 활동에 전념했다.
임진왜란, 반란 등서 공 세워
1592년 42세가 된 석탄은 임진왜란을 맞아 도학정치를 몸소 실천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석탄은 의기충천해 그를 따르는 향병 300여 명을 이끌고 전장에 나아갔다. 그 당시 그가 향병을 소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촌민들이 믿고 복종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의장대(義將臺)라는 단을 쌓고 주둔했지만, 군졸이 고영(孤零)해 진영을 갖출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엄정하고 조획에 실마리가 있었다. 이들이 우뚝 서자, 왜적들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거나, 약탈하러 나오는 자도 포로가 되거나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 적어도 지역사회 수호에 큰 공을 세운 그였다.
석탄은 임진왜란 당시의 군공뿐 아니라, 국내 반란에 대한 진압으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593년 12월에 직산현감으로 있을 때 발발한 송유진 일당의 민란, 3년 후인 1596년 7월 발생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직산현감으로 있으면서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하기 위해 활동했다.
또한 석탄 선생은 임진왜란과 이몽학의 반란 등에서 혁혁한 군공을 세우는가 하면,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출 사건에 대한 패륜적 부도덕성을 지적하고, 인조 초에는 봉사(封事)를 올려 나라를 병들게 하는 근원과 그 치유책을 논리정연하게 펼치기도 했다.
여론 중시하고 백성 안위 먼저 챙겨
석탄은 국가 위기에 처해서는 살신성인의 의리를 실천했고, 20여 년간의 수기 공부로 수양을 쌓은 그는 ‘인심즉천심(人心則天心)’이라는 가치관을 지키며 불굴의 희생정신을 감내했다.
그가 지방관으로 있을 때 감사 유공근은 “석탄은 ‘자상하고 청신한 관리로서 백성의 생각을 두려워한다”고 하였고, 어사 김정일은 “몸을 보존하고 지킴이 청고해 정사의 이치가 실마리가 있다”고 치하했으며, 임천군수로 재직 시에도 ‘재주와 기국이 비상해 치적이 뛰어났다’고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석탄 선생은 여론을 중시하고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위민정신에 철저하였다.
석탄이 67세 되었을 때 광해군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에 석탄은 ‘정사헌의’를 올려 천하의 일을 용인(容忍)과 용덕(容德) 즉,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고, 고운 마음으로 선을 즐기는 도량’으로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에 따라 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후를 폐함은 패륜행위로 그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자신이 양조의 은혜를 입은 음관으로서 입을 봉하여 자신만 보전하고 성상은 저버릴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와 친교를 맺었던 사계 김장생은 ‘학문적 연원의 바름이 있으며, 일신으로 강상의 무거움을 맡길 정도로 도에 충실하였다’고 하고, 우암 송시열은 ‘학문의 공이 큼’을 칭송했다. 석탄의 학문적 연원과 도학자적 실천정신에 투철한 그의 면모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운 바를 실천하고자 의병장이 되었고, 백성들의 삶을 세밀히 살피고, 패륜을 저지르는 왕에게 직언해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던 도학자 석탄 이신의 선생.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며 세운 기념관을 통해 석탄 선생의 뜻이 오늘날 고양시 주민들과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큰 귀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 글은 『문정공 석탄 이신의선생 학술발표 자료집』에 근거하였습니다.
깜짝 인터뷰
석탄 선생의 후손 탤런트 이한위씨
석탄 이신의 기념관 개관식장에 탤런트 이한위씨가 등장해 참석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개성 넘치는 연기로 출연작마다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있는 이한위씨는 석탄 선생의 31대손으로서 기념관 개관을 함께하게 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오늘 이처럼 성대한 개관식을 하는 모습을 보니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감개무량합니다. 좋은 드라마를 찍으려면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 하듯이, 앞으로도 석탄 기념관을 중심으로 전의이씨 종중과 고양시, 그리고 이웃 분들이 마음을 모아 뜻깊은 일들을 펼쳐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기념사진을 찍으러 다가오는 이들을 일일이 웃음으로 맞이한 이한위씨는 고양시에서 석탄 선생을 기리는 행사가 열릴 때면 언제든 흔쾌히 홍보 대사의 역할을 자청하며 달려오겠다는 약속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