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10대 숲길에 선정된 고봉누리길 황룡산 구간 나들이

지난 연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고양누리길의 한 코스인 고봉누리길이 ‘제1회 아름다운 숲길 인증제’ 평가결과 전국 10대 아름다운 숲길에 선정됐다는 것. 이웃에 사는 평범한 아가씨가 하루아침에 미스코리아가 된 격이랄까. 곁에 있는 숲길의 아름다움을 정작 우리들 스스로가 몰라봤다는 미안함을 사과할 겸 새해 첫 나들이는 고봉누리길로 다녀왔다. 나뭇잎은 모두 떨어지고, 폭신한 눈도 아직 내리지 않은 메마른 겨울숲은 언뜻 보면 조금 황량해보인다. 하지만 호젓한 산길의 매력을 조용히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절이 요즘이기도 하다.

고봉누리길은 산들마을의 안곡습지공원에서 시작하여 고봉산을 지나 황룡산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고양시 북서쪽의 주산인 고봉산은 그나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그 곁에서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황룡산은 누런 용이 누운 산이라는 멋진 이름과는 달리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134m의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울창한 소나무숲과 참나무 오솔길을 품고 고양과 파주의 경계를 가르는 산이 황룡산이다.     

현재로 소환된 과거, 금정굴

황룡산 둘레길의 출발점은 고봉로 삼거리에서 이어지는 금정굴에서 잡아도 좋고, 상감천마을의 용강서원에서 출발해도 좋다. 어느 곳에 차를 대 놓고 산행을 시작해도 전체 거리가 채 3km에 못 미치기 때문에 두어 시간이면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기자는 고봉산 주유소 옆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횡단보도를 건너 금정굴로 향하는 계단길을 택했다. 금정굴은 한국전쟁 당시의 혼란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원혼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2007년 국가가 과거사에 대한 잘못을 인정했지만, 후속으로 진행되어야 할 위령사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 큰 길에서 몇 걸음만 올라오면 현재로 소환된 비극적 과거의 현장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철책을 끼고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

정상을 향해 오르는 소나무 숲길은 한동안 철조망으로 둘러싼 군부대 담장을 끼고 이어진다. 금정굴 현장이 지속적으로 기억해야 할 과거라면, 군부대 철조망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잊혀지기를 기원해야 할 현재. 하지만 철조망길을 따라 걷는 이들의 걸음은 한없이 여유롭다. 긴장과 느긋함이 철조망 하나를 두고 길게 평행선을 긋는 풍경이 이채롭기도 하다. 일산동고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하는 지점부터 황룡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넓고 쾌적한 소나무숲길은 찾는 이들의 발길이 가장 많은 구간이다. 대개 가벼운 나들이 차림 그대로다. 걸음마다 밟히는 솔잎의 느낌이 상쾌하다.

일본목련, 너 정체가 뭐니?

하지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조금 걱정스런 풍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잎이 크기로 유명한 일본목련이 소나무들과 혼재해 있는 모습이 여기 저기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일본목련의 잎은 나무 크기에 상관없이 자그마치 50cm에 가깝다. 크기도 크기지만 겨울에도 잘 썩지 않아서 다른 식물들의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단다. 황룡산의 일본목련이 다른 수종들과 공존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확산 속도가 우려스러운 것인지에 대해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목련나뭇잎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기자의 장갑을 벗어 얹어보았다. 손바닥 두장을 합친 것보다 훨씬 넓다.

정상 대신 쉼터에서

변변한 오르막이 없으니 숨이 찰 새도 없이 싱겁게 정상에 도착한다. 고봉산과 마찬가지로 황룡산도 진짜 정상은 군부대에 내어주었다. 대신 소박한 벤치와 운동시설, 그리고 화장실이 있는 쉼터가 정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역시 장사바위가 실질적 정상 노릇을 대행하고 있는 고봉산과 닮은 꼴이다. 경기 북부 야산들의 슬픈 팔자랄까. 사방을 둘러보면 건너편 고봉산과 사리현동 방향의 오미산이 잘 보인다.

상감천마을로 내려서는 참나무 숲길

용강서원이 있는 상감천마을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에선 아까와는 사뭇 다른 경관이 펼쳐진다. 소나무숲 대신 참나무숲이 이어지고, 인적도 거의 없고, 길도 좁고 굽은 오솔길이다. 올라온 소나무길이 6차선 고속도로라면 내려가는 참나무길은 차선도 희미한 동네길이다. 작은 야산에서 서로 다른 느낌의 두 산길을 맛보는 재미가 있다. 황룡산의 매력 한가지가 비로소 정리된다. 소박함에 깃든 다채로움.  

세 인물을 모신 용강서원

산길을 내려와 시멘트로 만든 오래된 농수로 밑을 통과하면 고양에 있는 세 개의 서원 중 하나인 용강서원에 도착한다. (나머지 둘은 문봉서원과 행주서원) 산길은 여기까지다. 용강서원은 충정공(忠靖公) 박서(朴犀), 충민공(忠愍公) 박순(朴淳) 그리고 충민공의 외손(外孫)인 학당鶴塘) 조상경(趙尙絅)을 배향하고 있는 곳이다. 박순은 조선 건국 초기의 인물로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함흥에 칩거중인 이성계를 설득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피살당한 충신이다. 그의 고조부인 박서는 몽고침략시 귀주성을 지킨 장군이고, 조상경은 용강서원을 처음 세운 분이다. 용강서원에서는 매 년 가을 세 분을 기리는 추향제를 올리고 있다.

석주 선생님, 문안 인사 드립니다

상감천마을에서 출발지점인 고봉산 삼거리로 올라가는 길은 마을의 도랑을 따라 이어진 도보로를 따라가면 된다. 경치나 환경이 그다지 쾌적한 길은 아니지만 차량의 방해 없이 원점으로 회귀하기에 적합한 직선길이다. 길 중간에 권필 묘를 찾아가는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논둑길을 따라 군부대 정문쪽으로 조금만 가면 조선 중기에 문명을 떨친 문인이자 고양 8현의 한 분인 석주(石洲) 권필(權韠) 선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막상 가 보면 묘는 좀 초라하다. 볼 것도 없는데 왜 부르셨어요? 하고 물으면 권필 어르신이 넉넉한 웃음을 띄며 이렇게 대답하시지 않을까? “직선길을 걷는 게 너무 심심해보여 한번 불러봤다네. 후손님들, 너무 바쁘게들 살지 마시게나.” 고양 8현의 무게감과 소박한 묘의 조화. 그러고보니 오늘 돌아본 산과도 비슷하다. 미스코리아가 되었어도 여전히 격의 없고 수더분한 옆집 아가씨를 닮은 황룡산 말이다. 

 
용강서원 근처와 고봉산 삼거리에는 괜찮은 먹거리 집들이 몇 있다. 사진은 용강서원 근처에서 먹을 수 있는 얼큰한 동태탕. 움츠러든 몸이 확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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