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
추강(秋江) 남효온(1455~1492) 선생은 조선 전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행우(杏雨)이며 한양에서 태어났다.

1478년, 그의 나이 24세이던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의 소릉(昭陵)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훈구세력들로부터 ‘미친 선비’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해 살아있는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다 현실에서 소외된 채 술과 시로 쓸쓸하게 생을 마쳐야 했다.

추강은 일찍이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의 5대 손으로 글 읽기를 좋아하며, 총명하고 호방해 매사에 고사(高士)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같은 그가 약관의 이른 나이에 혁명가적 거친 삶 속으로 뛰어든 배경에는 조선조 초의 정치적 격변기에 나타나는 시대적 공분(公憤)과 함께, 선대의 영화를 이어가지 못한 그의 가족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추강의 고조부였던 남은(南誾)은 조선의 개국 1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왕자의 난’때 정도전과 함께 주살되었고, 좌의정을 지낸 증조부 남지(南智)는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단종의 보필을 부탁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이었다.

추강의 당숙뻘 되는 남이(南怡) 장군 또한 유자광을 비롯한 훈구파의 모함으로 역모에 몰려 멸문의 화를 입어야 했다. 추강은 단종 3년에 태어나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세조(世祖)의 만행과 함께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를 보고 들으며 자라야 했다. 이처럼 기성 정치권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는 그에게 훈구세력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 온 것은 성종(成宗) 9년(1478)에 일어났다. 새해 벽두부터 흙비(土雨)가 내리고,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이어지는가 하면 봄에는 때아닌 메뚜기떼가 기승을 부리고, 가을에는 복숭아와 자두나무에서 꽃이 피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군주(君主)가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노하여 갖가지 천재지변과 함께 기상이변이 나타나는 것으로 믿던 당시,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수렴청정을 마감하고 친정을 막 시작한 성종으로서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어떻게 하면 흙비가 내리는 재앙을 막을 수 있는가?’ 국정 전반에 걸친 반성과 대안을 묻는 구언교(求言敎)를 내렸다. 추강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종대왕에게 올리는 상서(上書)’라는 제목으로 그간에 금기시 됐던 소릉복위와 함께 정창손, 한명회 등 훈구세력들을 내치는 것이 천심(天心)에 순응해 변괴(變怪)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추강은 자신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금의 고양시 행주(杏洲)나루에 은거하며, 유장(悠長)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벗삼아 저술에 들어갔다. ‘가을의 강’이란 뜻의 추강(秋江)이란 호는 이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감성이 풍부하고 문장에 탁월했던 그는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겼다. 그 중에 백미는 그의 『금강산 유람기』에 실려 있는 ‘정향(丁香) 꽃 꺾어 말안장에 꽂고 면암을 지나 30리를 갔다’라는 대목이다. 정향의 순 우리말은 수수꽃다리이고, 영어로는 라일락이다. 멀리 있어도 진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지만, 어둠이 내리면 더욱 짙어지는 향기 때문에 고루한 선비들은 음기를 발동시킨다해 멀리하는 꽃이기도 하다.

추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9세, 1504년 갑자사화 당시 소릉복위를 상소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 됐다. 시신은 인근 주민들의 수습으로 고양시 대장동 기슭에 480여 년간 묻혀 있다. 1987년 신도시 개발과 함께 김포시 하성면 남씨 문중 묘지로 이장됐다.

2007년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행주 역사공원에 추강 시비(詩碑)가 세워져 그를 기리고 있다. 생전의 추강이 사랑했던 라일락 향기와 함께 아쉬운  5월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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