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을 동서남북으로 누비는 11번 시내버스 종점여행

고양시청 앞 정류장에 정차한 11번 버스. 시간이 멈춘 듯한 원당 옛 시가지를 관통한다.

“뭐 타고 왔니?”
“돈이 어딨냐? 그냥 11번 버스 타고 왔지.”
이 대화의 뜻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적어도 인생 학교 4~5학년 이상이리라. 그랬다. 승용차가 많지 않던 시절, 사람들은 도보로 이동하는 뚜벅이를 ‘11번 버스’라고 말하곤 했다. 두 다리를 11이라는 숫자에 빗댄 은어인 것이다. 비록 좀 느리긴 하지만 언제든 이용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고, 가장 경제적인 이동수단이다. 그 정신을 오롯이 구현하고 있는 대중교통노선이 실제로 존재한다. 바로 고양시의 전 지역을 누비는 일반시내버스 11번이다.

성석동에서 행신역까지 50여 개 정류장 지나

명성운수 성석동 종점에서 출발하는 11번 버스는 고양시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왼쪽으로 살짝 누운 S자 형으로 훑는다. 일산서구, 일산동구, 덕양구의 주요 행정구역과 상업지구는 물론, 수많은 아파트단지와 전통마을들을 골고루 지난다. 그 사이 30여 곳이 넘는 초·중·고등학교와 10여 곳의 대형 쇼핑몰을 경유하며,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지하철역도 3호선 4개 역, 경의중앙선 3개역에 이른다. 지나는 마을 이름을 꼽아보니 대충 추렸는데도 자그마치 24개에 이른다. 성석동을 출발해 반환점인 행신역에 이르기까지 50여 개가 넘는 정류장을 하나하나 들르며 5~10분 간격으로 쉴 새 없이 승객들을 실어 나른다. 일단 올라타면 웬만한 곳은 다 데려다주는 친절하고 오지랖 넓은 친구다.
11번 버스를 이용해 고양의 ‘시티투어’를 제대로 즐겨보자는 기대감에 행신역에서 버스에 올라 종점까지 가 보기로 한다. 돈 없고 시간 많던 학창시절 이후 처음 해 보는 동네 버스 종점여행이다. 특별히 설렐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루할 틈도 없다. 버스는 성실하고 부지런하다. 직선으로 가도 될 길을 굳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가능하면 승객을 한명이라도 더 태우고 싶어서 조바심을 하는 듯 보인다. 정류장을 옮길 때마다 느낌과 정서가 수시로 바뀌는 차창 밖의 풍경은 고양시의 역동적 변모를 압축적으로 스캔한 와이드 필름에 다름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흥미로운 시간 여행

행신역을 출발해 무원마을과 샘터마을을 지나면 덕양구의 중심인 화정이다. 아파트단지와 녹지공원, 그리고 번화한 상업지구가 교대로 등장한다. 어울림누리를 돌아 나오면 원당이다. 경제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70~80년대에 고양군의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 노릇을 했던 곳이다. 재래시장인 원당시장이 있고, 그 입구에 80년대 초반 고양군 최초의 복합 쇼핑센터로 지어진 리스쇼핑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고양의 토박이들에게는 향수와 추억을 선물해주는 공간이다.
원당시장을 지나면 고양시청이다. 100만 인구를 거느리며 전국 10대 도시로 커 버린 고양시 행정의 중심이다. 그러나 주변은 세월이 멈춘 듯 고양군 시절의 80년대 읍내 풍경이 에워싸고 있다. 다방, 표구집, 점술원 등 지금은 사라져가는 가게들이 여전히 눈에 띈다. 시청  다음 정류장 이름은 양조장입구다. 배다리 막걸리를 만드는 고양탁주 회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양시청과 양조장으로 상징되는, 수십년의 세월을 건너뛰는 두 개의 시간대가 단 한 정류장 거리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남아있는 것들 & 첨가된 것들

차 안에 붙은 노선도 속에서 고양의 숨가쁜 변화들을 엿볼 수 있는 이름들을 살펴본다. 상감천, 청석궁, 영심동마을 등은 아주 오래전부터 불리우던 전통마을의 이름이다. 원당시장, 양조장, 백마역과 일산역은 근대의 기억과 역사를 품고 있다. 리스쇼핑은 30살을 훌쩍 넘겼다. 일산신도시는 이제 막 20여 년이 되었고, 행신동과 화정은 20년이 채 안 되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아람누리와 어울림누리, 웨스턴돔은 사실 10살이 채 안되었으니 고양시 풍경의 새내기들이다. 11번 버스가 지나는 물리적 거리만 S자로 휘어진 게 아니라, 관통하는 시간 역시 S자로 휘어져 흐른다.

일산신도시 행정과 문화의 중심가인 일산동구청 앞 정류장.

백마교를 건너 일산신도시로 들어서면, 버스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 사이를 관통한다. 가로 세로로 넓게 분할된 단지 사이로 녹색의 근린공원과 상가, 학교가 박혀있는 패턴이 반복된다. 백석동 이마트를 지나 좌회전을 하면 메인 스트리트, 일산신도시의 축이 되는 중앙로다. 행정과 상업지구가 집중된 길이다. 하지만 KT사거리를 기준으로 백석역 방향과 대화역 방향의 풍경이 조금 다르다. 백석역 방향은 20여 년 전 자리 잡은 상가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신도시 초기 중심 상업구역의 풍경을 회고하기에 딱이다. 마두역의 한 상가 건물에는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기 전 단관 개봉을 하던 ‘나운시네마’가 있었다. 마두역 부근의 올림픽 스포츠센터는 변함없이 성업중이다. 반면 대화역 방향으로는 새로운 풍경들이 수시로 업데이트되었다. 라페스타와 웨스턴돔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상업 중심이 쇼핑인구의 이동을 촉발하기도 했다.

곡선 이동의 느긋한 즐거움

원당과 함께 고양의 오래된 시가지를 대표하는 일산의 구도심을 11번 버스가 외면할 리 없다. 일산서구보건소를 지나며 살짝 인사를 남기고는 중산으로 향한다. 오른쪽 위로 고봉산을, 왼쪽 아래로 황룡산을 끼고 달리다 고봉주유소에서 왼편으로 휘어지면 내리막길이다. 샘물이 달다는 감내마을이다. 신도시의 분주함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옛 마을이다. 버스가 성석동의 차고지로 들어선다. 비로소 집에 들어왔다. 엔진이 가쁜 숨을 가라앉힌다. 한가한 낮시간이라 그런지 1시간 30분 밖에 안 걸렸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A지점에서 B지점까지 가장 가까운 이동수단을 찾아주는 앱을 상시적으로 사용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11번 버스는 속도와 효율만을 강요하는 직선적 사고를 잠시 내려놓아보라고 권한다. 행신역에서 백마역까지, 경의중앙선을 이용하면 단 네 개의 역을 지나면 되는 거리를 11번 버스는 25개의 정류장을 거치며 도달한다. 백마역에서 일산역 구간도 마찬가지다. 질러 가지 않고 에둘러 가지만, 어쨌든 목적지에는 도착한다. 삶이 쫓기듯 느껴질 때, 한나절 쯤 생각을 비우고 11번 버스가 구현하는 곡선적 이동의 미학을 느긋하게 즐겨볼 만도 하다.
“좀 느긋하게 기다려 보렴. 네가 어디를 가고 싶든, 삶이 어련히 데려다 주지 않겠니?”

성석동 종점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