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돈·이영옥 부부의 분홍빛 황혼

▲ 4년 전 치매에 걸린 아내 이영옥(85세)씨의 옷에는 ‘사랑하는 공주’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남편 주형돈(86세)씨가 아내를 생각하며 직접 쓴 손글씨다.

85세 치매 아내 보살피기 위해
86세 남편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

[고양신문] 85세의 이영옥 할머니는 4년 전 치매 판정을 받은 이후 ‘귀여운 공주’가 됐다. 이른바 ‘예쁜 치매’ 환자다.(인지기능은 좀 떨어지더라도 감정 조절이 잘 되는 치매 증상을 보통 ‘예쁜 치매’라 부른다.)

평생을 함께해온 가족과의 추억까지 지워버리는 무서운 치매지만 천생 여자인 할머니의 본성마저 바꿀 수는 없었나 보다. 이영옥 할머니는 취재 중에도 ‘폭풍 애교’를 보이며 남편에게 돌연 뽀뽀를 요청했다. 남편 주형돈(86세)씨는 잠시 쑥스러워했지만 응당 그래왔다는 듯 못 이기는 척 뽀뽀를 받아줬다.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이 어린 아이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맞추자 집안 가득 행복한 기운이 감돌았다.

건강했던 아내에게 치매는 한순간에 찾아왔다. 작은 사고였다. 할머니는 4년 전 길을 걷다 넘어졌고 외상에 의한 혈관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았다. 여든 살 넘은 노부부는 자식 셋을 출가시키고 오래 전부터 단 둘이 살아왔기에 치매라는 무거운 짐도 오롯이 두 사람의 몫으로 끌어 안았다. 자녀들이 인근 도시에 살고 있어 자주 들르긴 하지만 그들도 이제 나이가 60이 넘거나 가까운 이들이다.

“아내가 치매에 걸리고 처음엔 화병이 났어요. 나도 한동안 치매에 걸린 것 같더라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똑똑했던 아내가 이렇게 한순간에 변해버렸으니…. 주변에 치매 걸린 사람이 없어서 치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거야.”

남편은 체구는 작지만 86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하고 활동적이다. 경로회장과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해 오던 남편은 사회활동을 줄이고 하루 종일 아내와 함께 지낸다. 지금까지 1주일에 세 번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아내를 돌보고 집안일을 거들었지만 이제는 남편이 모든 것을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취재가 있던 8월 30일은 남편 주형돈씨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날이었다. 86세 고령자의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240시간의 교육을 받고 필기시험을 한 번에 통과했다. 남편은 자격증까지 땄으니 다른 사람 도움 없이 당분간은 직접 아내를 돌보고 싶단다(취재가 있던 날은 4년간 함께해온 요양보호사가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아내를 돌보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지인의 추천을 받고 요양보호사에 도전하게 됐다는 남편은 6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을 받으려고 아내를 집에 혼자 두고 나오면서 마음 졸일 때도 많았다.

오후 6시부터 매일 4시간씩 야간교육을 받았는데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아내를 재우고 나오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고가 걱정돼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지도 못했다. 빌라 경비원에게 아내가 혹시 나오면 잡아두고 연락 달라는 부탁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남편은 잠든 아내를 두고 매일 밤 외출을 감행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렵게 취득한 자격증이다.

“교육을 받으면서 치매의 원인과 종류, 증상이 그렇게 다양하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어요. 이제는 내가 많이 배웠으니 아내를 더 살뜰히 돌봐야지.”

남편은 아내를 위해 공부를 했고 치매의 종류, 환자를 대하는 기술 등을 배우고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80시간의 실습을 통해 여러 치매환자를 접하면서 아내의 상태를 비교·확인할 수 있었다.

“폭력적이고 무서운 환자들도 많더라고요. 그에 비하면 아내는 천사지. 정말 예쁜 공주야. 젊었을 때보다 애교가 더 늘었어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 아내는 남편의 핸드폰 번호가 적힌 팔찌를 항상 차고 다닌다.

애교 만점의 치매 환자지만 아내의 병세는 점점 깊어지고 있다. 해마다 증세가 악화되면서 남편의 걱정도 늘었다. 자격증을 딴 다음날(8월 31일)은 남편 혼자 아내를 보살피는 첫날이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더 힘을 내보려 애썼다. 함께 장보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마트로 산책도 나가볼 참이다. 집 근처 정발산도 더 자주 오르겠다고 다짐한다.

젊을 적부터 싸운 일이 거의 없는 금슬 좋은 부부지만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찹쌀떡처럼 꼭 붙어 지내게 된 부부. 남편 주형돈 어르신은 “아내가 실없는 말을 해도 아기 데리고 노는 것처럼 모두 대꾸해 주면 된다”고 말하며 아내를 보고 씨익 웃는다. 그런 남편을 보고 아내 이영옥씨는 “까꿍~” 소리 내며 같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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