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독립운동-끝>
고양의 독립운동 여덟 번째 연재이자 마지막 글이다. 이번 호에는 벽제면 대자리와 관산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일대는 ‘나라사랑 고양누리’로 만들어야 할 곳이다. 역사적 장소와 인물 묘소나 유적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첫째, 독립운동과 관련해, 관산리 뒷산[사료에는 가장곡산(加長谷山)으로 나온다]은 3·1운동 시위지다. 1919년 3월 27일 관산리에서는 주민 30여 명이 가장곡산 정상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김종환을 비롯해 김자근봉(金自斤奉, 23)·정재점(鄭在点)·정의양(鄭宜陽)·정태용(鄭泰鎔)·최숙석(崔淑石)·한기원(韓起元)이 주도했다.
이들은 1919년 3월 초순 이래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관산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김자근봉 등 5명이 마을 부근 산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면 이에 호응해 김종환은 마을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운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지고 인근 마을까지 번졌다. 일본 경찰은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 일로 김자근봉·정재점·정의양·정태용·최숙석(대통령표창) 등이 징역 6월, 김종환(金宗煥, 41, 대통령표창)·한기원(대통령표창)은 징역 4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대자리에서는 응봉산이 3·1운동 만세시위지다. 1919년 3월 26일 대자리의 이해철(李海喆, 당시 41), 권선용(權先用, 52), 이상돌(李上乭, 32) 등은 벽제면 대자리에 있는 응봉산에 올라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불을 피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시위는 다음날까지 계속됐고 이웃마을로 퍼져갔다. 이들은 이 일로 붙잡혀 모두 징역 6월형을 선고 받았다. 위 네 주도자들은 각각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둘째, 이 지역에는 유사한 성격으로 묶을 수 있는 고려말 및 조선시대 유적, 묘지와 6·25 참전비 등이 있다. 즉, 고려말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교훈으로 유명한 최영 장군의 묘, 조선 숙종 때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부친인 경원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이 세운 영사정이란 재실이 있다.

인원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돼 70세까지 장수하면서 왕비(숙종)로서 19년, 왕대비(경종)로서 4년, 대왕대비(영조)로서 33년, 도합 55년간 왕실을 지켰다. 그러는 동안 부친 김주신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김주신은 공인으로서 바른 몸가짐에 극도로 주의해 당파 간의 정쟁이 극심했던 그때 정쟁에 휩쓸리거나 이권 개입, 또는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왕궁을 드나들 때는 버선코만 보고 걸으며 눈길조차 함부로 두지 않았다.

마침 고양시도 이러한 역사적 장소에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위의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와 고려말에서 현대에 이르는 최영 장군 묘, 영사정, 김주신과 그 후손 개화총리 김홍집 묘, 필리핀 6·25참전기념비 등을 ‘나라사랑’으로 묶어서 “고양나라사랑 누리”로 명명하는 것을 기대하며 연재를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