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를 아시나요?

1890년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치르며 파란만장 역사 겪어
깊은 이야기와 멋진 경관 품은 전원교회 꿈꿔
 

[고양신문]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교세가 큰 종교는 개신교다. 이를 증명하듯 고양시의 개신교 교회 숫자만 해도 8000여 개에 이른다. 그 많은 교회 중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는 과연 어느 교회일까? 정답은 덕양구 행주외동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행주교회다. 조선조 고종 27년인 1890년에 교회가 세워졌으니 올해로 자그마치 128살이 되었다.  

 

 

행주외동 언덕 위 아름다운 예배당 

행주교회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행주산성 정문과 시정연수원 진입로를 지나 장어구이와 참게매운탕으로 유명한 행주외동 먹거리마을로 들어서야 한다. 교회 이름이 적힌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길이 끝나는 언덕마루에 차를 세우니 비로소 행주교회가 보인다. 붉은 벽돌과 흰색 기둥으로 단정하게 지은 예배당 건물과 지난 해 새로 완공한 비전센터 건물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자리를 잡고 있다.

비전센터에서 자리를 함께한 정건화 목사, 김진옥 원로장로, 이흥윤 장로, 김신규 원로장로(사진 왼쪽부터).

 

비전센터에 들어서니 남향으로 난 커다란 통유리창을 통해 행주외동 마을 너머 행주대교가 지나는 한강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정건화 담임목사(56세)가 부드러운 미소로 기자를 반갑게 맞는다. 조금 뒤 김신규 원로장로(76세), 김진옥 원로장로(74세), 이흥윤 시무장로(72세)가 차례로 도착한다. 두 분 원로들의 흰머리가 ‘장로’라는 이름에 잘 어울린다. 모두 행주초등학교를 졸업한 행주동 토박이들이다.
“조상들로부터 6대째 행주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행주교회는 제 삶의 터전이었지요.”
김신규 장로의 말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첫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4번째 교회 

행주교회를 세운 이는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중 한 명인 언더우드 선교사다. 언더우드는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딛는다. 이후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연세대학교 개교의 주춧돌을 놓는 등 선교와 교육, 의료 등 다방면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언더우드가 이 땅에서 30여 년간 선교활동을 하며 세운 교회는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 27개에 이르는데, 명단의 4번째로 등장하는 교회가 바로 행주교회다. 조선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들 중 하나인 것이다.

 

6대째 행주교회를 지킨다는 김신규 원로장로.
당시 행주는 인천 제물포항과 서울 마포를 잇는 뱃길의 중간 기착지로서, 많은 사람과 문물이 드나드는 번성한 포구마을이었다. 한강 뱃길을 여러 차례 오갔을 언더우드 선교사의 눈에 행주마을이 예사롭잖게 보였을 것은 당연했으리라.    

 

“처음엔 한 신도의 집에서 기도회 하듯 모이다가 교인들이 많아지니까 작은 초가지붕 교회를 마련했답니다. 고양 지역의 유일한 교회였으니 먼 곳에서 찾아오는 교인들이 많았다더군요.  몇 해 후엔 교인들이 많아지면서 능곡쪽에 있는 교인들이 교회를 분립 개척했구요. 사뫼 언덕에 세워 사산교회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능곡교회죠.”

“한강 건너 개화리(서울 개화동)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예배드리러 오곤 했대요. 큰 절기가 되면 우리 행주교회에 다들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했구요.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찾아오셔서 성경을 가르치고 세례와 성찬식을 할 때엔 150명의 교인들이 모였다니 초기의 교세를 짐작할 만합니다.”

선조들에게 전해 들은 설립 초기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역사의 고비마다 잊지 못할 경험 치러

행주교회가 처음 자리잡은 곳은 한강 기슭에서 가까운 마을 아래쪽이었지만, 몇 차례의 이전을 하며 점점 언덕 위로 올라와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건물 형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초가집에서 기와지붕으로, 다시 벽돌 예배당으로 변모했다. 초기에는 큰 비로 인해 수해를 입기도 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포탄에 맞아 건물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128년이라는 세월 동안 행주교회는 조선후기,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한국전쟁 등의 역사를 온몸으로 치러냈다.

자랑스런 기억만큼이나 혹독했던 기억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절의 역사는 다시 돌아보기에도 가슴 아픈 일들이었다.    
“새로운 문물이 일찍 들어오는 곳이라 그랬을까, 해방을 전후해서 행주마을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유독 좌우의 이념 대립이 심했지요. 마을이 양쪽 세력으로 양분되어 맞서던 시절에 교회에는 대한청년단 단원들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거예요. 불과 며칠 만에 행주까지 인민군들이 밀어닥쳤으니, 교회 신자들이 당한 희생과 고난이 말도 못했죠.”

 

역사가 남긴 상처를 되돌아보며 평화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김진옥 원로장로.
김신규 장로의 증언대로 당시 젊은이들은 죄다 마을회관에 억류되고, 나이든 이들도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모진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김진옥 장로는 한국전쟁 당시 아직 어린 꼬맹이였지만 당시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마을회관에 잡혀있는 어른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날랐던 일이 지금도 또렷해요. 결국 회관에 잡혀 있던 아버지 세대들은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함께 북으로 데리고 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지요.” 

 

전세가 역전돼 국군이 들어오자 이번에는 왼쪽에 서 있던 이들이 희생을 치렀다. 이후로도 몇 차례 엎치락 뒤치락, 미움과 폭력을 주고 받으며 번갈아가며 피를 흘리는 참혹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매 맞으며 믿음을 지켰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지요. 다시는 그런 슬픈 역사가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전쟁의 상흔에서 일어서는 구심점 역할

전쟁 이후 재건의 시기에는 교회가 중심이 되어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행주교회가 지역사회를 비추는 믿음직한 등대가 됐던 것이다. 이흥윤 장로는 20대였던 60년대 초에 마을에서 한글학교 교사를 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한글을 못 깨친 이들이 아직 많았거든요. 지도면장이 한글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을 줘서 사람들을 모아 가르쳤지요. 아무래도 성경과 찬송가를 자주 접하는 교인들이 먼저 한글을 깨쳤지요.”

하지만 80년대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60년대와 70년대는 교회가 활력이 넘쳤어요. 집집마다 아이들이 너댓 명씩 됐으니까 항상 아이들 소리로 북적였구요. 하지만 마을의  교세가 위축되었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행주나루의 기능이 상실되며 행주외동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 아닌 오지마을이 되고, 그린벨트와 군사지역 등으로 개발이 제한되면서 마을 자체가 점점 쇠락했으니 말이다.

이름 없는 인연에서 시작된 사랑의 불꽃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입증할만한 물건들이 많이 남아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래 된 자료로는 100여 년 전 기와집 예배당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이 유일하다. 하지만 귀 기울여 들어보니 행주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자료보다 더 소중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해 가을, 행주교회 식구들은 귀한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던 것이다. 이 자리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27개 자매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을 비롯해,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손 70여 명도 미국과 호주 등에서 내한해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백주년기념관에서 감격적인 기념행사를 치른 것.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원득한씨와의 감격적인 만남. (사진 왼쪽부터) 이흥윤 장로, 원득한씨, 김신규 원로장로.

 
그 자리에서 행주교회 정건화 목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인 언더우드 3세 원득한씨를 만나 소중한 이야기를 듣는다. 올해 91세 노신사인 원득한씨는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행주교회를 찾아가 놀았던 추억이 생생하다며,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직접 들은 행주교회 설립에 대한 숨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1890년에 콜레라가 창궐했던 시절에 길에서 죽어가던 지게꾼 곁에서 한 서양여인이 슬피 우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 하나가 서양 부인이 왜 조선 사람을 보고 우느냐며 물었답니다. 그 부인은 고종 황제의 명으로 명성황후의 주치의로 있던 릴리어스 홀튼 여사, 바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었죠. 홀튼 여사가 질문을 하는 행인에게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를 물었는데 행주에 살고 있다고 했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행주마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찾아오고, 행주교회가 설립되는 계기가 됐다고 하더군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사람과 홀튼 여사의 교감이 작은 불꽃이 되어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이다.

90세가 넘은 언더우드 3세 원득한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듣지 못했을 감동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행주교회의 원로 세대들이 떠나가면 잊혀지고 말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김신규 장로는 오래된 교회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의 오래 된 시골 교회는 모판이나 마찬가지예요. 시골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자란 세대들이 다 대도시로 나가 발전을 이뤘으니 말입니다. 아쉽게도 모판은 점점 기능을 잃고 비어가지만요.” 

130년사 정리 통해 희망의 초석 마련하고파

오늘날 행주교회는 두 가지 도전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품어내고자 한다. 하나는 교회의 깊은 역사를 스스로 정리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이다. 행주동주민자치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흥윤 시무장로는 교회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 소명을 다 하고자 한다.
“2년 정도 잘 준비해서 2019년에는 『행주교회 130년사』를 꼭 발간하고 싶어요. 원로장로님 세대들이 떠나시면 기억의 창고도 텅텅 비게 되니까, 더 늦기 전에 행주교회가 품고 온 이야기들을 한자리에 모아야 하지 않겠어요?”

김신규 장로도 동의한다.
“사실 건너편 행주성당은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면서 지역에 많이 알려졌는데, 그에 비해 성당보다 먼저 세워진 행주교회에 대해서는 아는 분들이 너무 없어요. 이제라도 행주교회의 역사와 가치를 고양시민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행주교회의 비전을 세워가고 있는 정건화 담임목사.
흩어진 과거의 기억을 가다듬는 일이 첫 번째라면,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행주교회의 두 번째 도전이다. 정건화 목사는 지난해 비전센터를 세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이름처럼 새로운 꿈과 가능성을 품고자 하는 건물입니다. 그동안 예배당 건물만으로는 친교나 교육 활동에 제한이 많았는데, 카페와 미팅룸을 갖춘 비전센터가 만들어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어요. 이곳을 중심으로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작은도서관, 어르신들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 등을 펼칠 계획입니다.”

 

지역사회의 등대 밝혀 찾아오는 교회 만들고파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참석자들에게 행주교회에 대한 소망을 들려달라고 했다. 김진옥 장로는 소박하지만 진심 어린 바람을 이야기했다. 
“내 조상들이 지킨 교회, 내가 지킨 교회를 내 후손들이 든든히 지켜줬으면 합니다.”
김신규 장로는 최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를 향한 비전을 밝혔다.
“젊은 사람들이 활력 있게 드나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흥윤 장로 역시 방문자에 대한 초청의 인사를 전한다.
“128년 된 행주교회를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데, 와 보시면 참 좋은 교회입니다. 한강이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전원교회이자, 오래 된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교회니까요.”
정건화 목사의 이야기에서 128년 행주교회가 열어 갈 새로운 미래의 모습이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이야기가 있고 아름다운 환경이 있는 교회, 행주교회만의 매력을 제대로 알려서 휴일에 찾아와 휴식을 누리고, 여러 세대가 함께 공동체의 기쁨을 나누는 교회로 만들고 싶습니다.” 

 

인터뷰에 함께한 이들이 비전센터 앞에 섰다.

 


"누구나 찾아오는 교회, 역사와 쉼이 함께하는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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