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석영, 신작 들고 고양시 찾아 북콘서트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북콘서트 후 싸인중인 황석영 작가


자신의 삶과 시대 담은 자전(自傳) 『수인』 펴 내
작가는 나락에 떨어져도 글쓰기 통해 구원받는 존재
“시민들이 중심 돼 문화다운 문화 만들자”

 

[고양신문] 소설가 황석영 작가의 북콘서트가 지난 26일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성황리에 진행됐다. 황작가는 고교 재학 중에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객지』,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장길산』등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작품을 썼다. 이날은 최근 출간한 자전(自傳) 『수인』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책의 일부분을 직접 낭송하고, 자신의 삶과의 문학, 고양시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려줬다.

이날 행사는 사전예약을 통해 신청한 200명 이상의 관객이 자리를 채워 황작가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속칭 ‘황구라’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황 작가는 진행을 맡은 문화평론가 정윤수 교수의 질문에 특유의 청산유수 달변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인터뷰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26일 황석영 북콘서트를 진행중인 정윤수 문학평론가(왼쪽)과 황석영 작가(오른쪽)

책 제목 ‘수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 달라.

수인(囚人)은 영어로 ‘The Prisoner’라고 표기했는데 ‘감옥에 갇힌 자’를 뜻한다. 책 말미에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는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에 대해 썼다. 그것을 끝끝내 벗어 날 수 없다는 의미로 책 제목을 정했다.

『수인』을 통해 ‘자유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다. 평생 내 인생을 돌아보니 자유를 향해 비틀거리며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를 주제로 한 책이다. 개인사를 담고 있지만 우리시대의 내 또래, 혹은 후배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반도에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서사가 많은 세월을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일본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나는 서사가 많은 한국에 태어난 네가 부럽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이야기 거리가 많은 나라에 사는 것이 부럽다는 뜻이자 우리가 살아온 삶에 우여곡절이 많고, 아주 끔찍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때 나는 “너희들의 (무책임한)자유가 부럽다”고 시니컬하게 답했다.

초고는 6000매 분량인데 2000매가 잘렸다고 들었다.

집사람이 편집자 출신으로 문학동네를 창립한 전대표 강태형 시인과  둘이 원고를 편집한 장본인이다. 출판사 오너와 집사람 둘이 내 원고를 잘랐다. 세계3대 자서전 명작이 있다.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자서전, 루소의 『참회록』, 러시아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서전에 자기 자신의 치부를 쓰고 잘난 척을 안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통 때도 허세를 좀 부리고 잘난 척을 하는데 그런 부분을 자른 것 같다.

『장길산』을 완결했을 때 만신(萬神)이 완간기념 굿도 크게 했다. 자신의 운명을 주술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내가 베를린에 갔을 때 장벽이 무너지기도 했고, 내가 있는 곳에 뜻하지 않은 사건들이 종종 발생해서 ‘황석영이 가는 곳에 가지 말라’는 말도 있다.

내가 좀 조숙했다. 20대 때 등단한 후 장길산을 32살에 시작해서 42살에 끝내 버렸다. 남들은 말년에나 하는 작업을 그때 했다. 나는 작가로서 내 인생과 문학을 합치시키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학을 살아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게 운명이 될 줄은 몰랐다.

작가는 나락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다. 지옥에 떨어져도 그것을 글로 쓰면 된다. 안기부 지하실에 잡혀갔다 조사를 받고 나갈 때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이 사람 괜찮아. 나가면 다 이걸 글로 쓸 거 아냐.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찌개백반이 될 거 아냐.” 사실 맞는 이야기다.

정권에 반항하고 자본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무릎도 상하고 머리도 깨졌다. ‘나가기만 해봐라. 좋은 글 써야지’라는 생각으로 견뎠다. 글을 쓰겠다는 염원이야 말로 늘 나를 구렁텅이에서 건져내는 힘인 것 같다.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진행된 황석영 북콘서트 현장

경복고 재학시절 문예반이 아닌 등산반이었다. 문예반이었던 문학평론가 김현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어려서부터 문학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글 쓰는 티를 내는 것이 딱 질색이어서 표내지 않으려고 했다. 고 1때 몰래 담배를 피우다 고 3인 문예반장 김현에게 걸려 같이 피우며 친해졌다. 그도 자유주의자적 기질이 있었다. 당시 또래들은 일본의 ‘다이쇼교양시민문화’의 영향으로 허위의 ‘교양 없는 교양주의’가 유행했다. 당시 김현은 문집에 수필을 썼는데 제목이 ‘아스파라거스’다. 첫 문장이 “아, 아스파라거스, 얼마나 이국적인 이름인가!”다. 그 글을 쓴 뒤로 나한테 평생 놀림을 당했다.

90년대 초반에 쓴 에세이 중 ‘문학을 지망하는 아우에게’ 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의미는.

문학처럼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고 가정할 때, 매일 들여다보면 이에 낀 고춧가루도 보이고 점도 크게 보인다. 정말 사랑한다면 좀 떼어놔라. 문학을 사랑할수록 거기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좀 떼어 등 뒤에 놔라. 그리고 네 삶을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사랑하는 여인이 등 뒤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네 옆에 있다고 톡톡 치는 것처럼 문학도 너에게 다가올 것이다.

 

황석영 작가 북콘서트 후 싸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독자들과 싸인중인 황작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다면.

혹자는 내 작품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나 서정적 리얼리즘이라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리얼리즘의 확장으로 샤머니스틱 리얼리즘이다. 외할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다.

역사도 그렇고 인간의 삶도 그렇고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다. 불교에서는 기억을 집착이라 말하며 그것을 놓으라고 한다. 그래야 열반에 든다고 한다. 기독교 경우에는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했던 샤머니즘을 보면, 꿈속에 있는 기억까지 끝까지 끌어내서 그 이야기를 무당을 통해 말해준다. 꼭 소설가 같이 다리를 놔준다. 진실이 밝혀져야 ‘해원(풀이)’이 된다며,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빌고, 용서하고 상생하라고 한다. 현실을 대하는 자세가 대단한 것 같다.

초기 내 문체는 객관적 단문에 형용사가 배제된 서구적 문체였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소설과 문학의 전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 나의 서사 방식으로 세계의 현실을 동아시아적인 생각에 담겠다고 결심했다. 토착성과 토박이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문학을 하겠다는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어떻게 보았나.

나는 광주에 관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써서 젊은이들을 망쳐놓은 사람 중의 하나다(웃음). 역사적인 큰 흐름 속에 ‘택시운전사’ 같은 작은 이정표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영화 시사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택시운전사 만섭은 전혀 의식이 없는 우리들,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외국인 기자를 태워 광주로 가며 보통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 사람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웃도시 순천에서 딸아이에게 전화로 “내가 손님을 거기 두고 왔어.”라고 말하고 다시 돌아간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소시민의 그런 반전들, 작은 깨달음들이 쌓여 역사가 변하는 것이다.

작년 겨울의 촛불이 그런 게 아닌가.

지난 5월 토리노 도서전에 갔을 때 이탈리아 작가들이 “전 세계가 반동화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바람에 금방 꺼지는 촛불을 들고 그런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느냐?”라고 묻더라. 어깨가 으쓱했다. 나도 6차까지 나가서 폐렴에 걸려 지금 담배를 못 피워 아쉬워 죽겠다(웃음). 민주주의 틀이 쌓이고, 물이 차서 흐르고 넘쳐서 그런 단계까지 와 있었던 거다.

촛불은 조직되지 않고 약속되지 않았는데도 연대에 의해 대중에게 공공성이 생겼다. 총을 쏘고 피를 흘릴 필요가 없이 대중적 설득력과 시대적 설득력을 얻었다. 공공성은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쟁취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촛불은 선진화된 민주사회 체제로 가는 근대사의 분수령이다. 평화까지, 나아가 통일까지 쟁취할 수 있으리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고양시의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양시에 20년 째 살고 있다. 그간 고양시의 문화 행사를 보면서 불만이 많았고, 소 닭 보듯 했다. 고양시에는 문화인 2만 여명이 살고 있다. 나는 한 해에 세금을 8억을 낸 적도 있다. 시민들에 의한 좋은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정발산로 동네 이름이 ‘무궁화로’다. 10년 째 태극기와 새마을기가 함께 꽂혀 있는데, 구시대의 유산으로 보기 불편하다. 호수공원의 조형물들도 이해하기 힘들다.

유럽에 가보면 작은 도시에서 세계적인 영화제나 아동문학제, 도서전 등을 개최하는 곳이 많다. 일본의 경우 구민도서관이 3만 여개다. 그곳이 문화센터역할을 하고 모든 교육과 토론, 독서와 작가 모임을 연다. 고양시에도 문화다운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 전시행정을 없애고 문화 수준을 높이자. 고양시 문화를 같이 바꿔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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