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

[고양신문] 고양8현(高陽八賢)의 한 분이자, 임진왜란 당시 고양 지역의 대표적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이신의(1551~1627) 선생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형조판서 원손(元孫)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4세 때 아버지를,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을 겪으며 백씨로부터 학문을 익혀야 했다. 후일 행촌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들어가 사계 김장생(金長生) 등과 친교를 맺었다.

1582년(선조 15년) 그의 나이 32세 때 학행으로 천거돼 종8품의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라는 첫 관직을 갖게 됐다. 이후 그는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곧바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고양(高陽)으로 내려와 왕도와 치세에 관련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대학차록(大學箚錄)』을 저술하는 등 유학자로서 자신의 수양과 학문 증진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던 그의 나이 42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했다.

그는 향병 300여 명을 모집해 ‘이신의창의대(李愼儀倡義隊)'를 조직하고, 창릉천 넘어 왜군의 진지가 건너다보이는 고양 도래울 마을 동쪽 도라산 언덕에 단(壇)을 쌓고 제를 올리며 왜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적군을 직접 상대하기는 무리. 그는 밤마다 의병들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 산 주변을 돌게 하는 한편, 창릉천에 쌀뜨물 빛깔의 백토를 뿌려 의병대의 규모가 크고 군량미가 넉넉함을 과시하는 심리전을 펼쳤다.

당시 고양 백성들은 ‘이신의창의대’의 활약으로 왜군에 침탈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또한 왜군으로 하여금 창릉천을 쉽게 도강하지 못하게 전략을 구사하는 한편, 야음을 틈탄 기습으로 적진을 혼란시켰다. 이신의 부대의 이같은 노력은 후일, 남서쪽으로 불과 4㎞ 떨어진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의 아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이신의 의병대의 활약상은 창의사 김천일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 잘 나타나 있다. 이로 인해 이신의 의병장은 사옹원 직장을 거쳐 형조좌랑(종6품)으로 파격 승진했다.

종전 이후 이신의는 괴산 군수, 임천(충남 부여 임천) 군수, 홍주 목사, 해주 목사 등을 지낸후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올랐다. 하지만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선조의 후비, 영창대군의 친모) 폐비를 반대하다가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됐다. 이때 그는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울타리가 쳐진 집에서, 당시 회령 병마절도사 이수일(李守一)이 구해준 거문고(국립광주박물관 소장)를 벗삼아 ‘단가 6수’를 비롯해 송, 국, 매, 죽(松,菊,梅,竹)을 노래한 ‘사우가(四友歌)’를 짓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재이후(災異後) 응지봉사(應旨封事)’라는 충정어린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다. 하지만 곧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일어나고, 이신의는 강화도로 피신하는 인조를 호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수원 마정리 어느 남루한 객사에서 “우국일념(憂國一念)”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세수 77세,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위폐는 고양 문봉서원과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됐다.

고양시 덕양구 이신의 선생 묘소 주변에 새롭게 단장한 기념관에는 ‘선조 어필 병풍’을 비롯해 그에 관한 유물, 유품들이 다수 전시돼 있다. 오늘날 도래울, 도라산, 도내동(道乃洞) 등과 같은 지명들은 당시 이신의 부대가 산 주변을 돌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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