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로 역사학자 초청 제65회 고양포럼>
[고양신문] 내년이면 3·1절이 100주년을 맞는다. 이번 고양포럼은 100주년을 1년 앞둔 시점에서 3·1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19일 덕양구청에서 열린 포럼에는 강사로 윤경로 역사학자(전 한성대 총장)가 초청됐다. 이날 윤경로 전 총장은 “주권재민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결정적 단초가 3·1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를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다’고 주장했다. 그의 강연 내용을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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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시위, 민중들은 왜 나섰나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음식점인 태화관에 모였다.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최린이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이 사실을 통고했고 이들이 구속됐다. 이들이 실내에 모여서 선언서를 낭독한 이유는 유혈사태를 우려해서였다.
같은 시각 젊은이들은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를 기다렸으나 이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바로 시가행진에 나섰다. 시가행진이 종로거리를 지날 때 당대 최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윤치호(YMCA 총무)는 그날의 광경을 일기에 이렇게 기술했다.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시위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회관(YMCA) 문을 닫기로 했다.”
윤치호를 포함한 국내 지도급 인사들의 당시 상황인식은 한마디로 독립 무망론과 무용론이었다. 하지만 당대 지식인들의 우려와 달리 3·1만세 시위의 열기와 운동력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급기야 한국인이 거주하는 세계 각국 도처로 그 불꽃이 확산됐다.
많은 사람들이 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것일까. ‘나라 팔아먹은 임금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 없다’는 유생층의 여론에서 보듯 그것이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 가장 큰 요인은 제국주의 억압통치와 착취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저항의식, 곧 독립정신에서 비롯됐다.
3·1절은 ‘운동’인가 ‘혁명’인가
우리는 그동안 개천절, 제헌절 등과 함께 국경일의 하나로 ‘3·1절’이라 불러왔다. 하지만 최근 3·1운동이 지닌 역사적 의의를 더 부각시키자는 대안의 하나로 ‘3·1혁명’으로 명명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만세사건’의 명칭은 ‘소요’ 혹은 ‘폭동’이었다. 마치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학난’이라 불리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사학은 해석학이다. 1930년대까지는 3·1운동과 3·1혁명이 혼재돼 사용됐다. 1938년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는 ‘3·1대혁명’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1941년 광복군 기관지에는 3·1운동을 ‘1919년의 전민족의 대혁명’이라고 규정했다. 해방직전인 1944년 대한민국 임시헌장 서문에도 ‘삼일대혁명’이라 표현했다. 이런 분위기는 해방직후에도 변함이 없어 이승만과 김구의 연설에서 3·1혁명 또는 3·1대혁명이라는 말이 빈번히 사용됐다.
제헌헌법 초안 전문에도 ‘3·1혁명’이라 돼있었다. 하지만 이 초안이 국회 심의과정에서 혁명이 운동으로 바뀌었다. 혁명이란 용어를 즐겨 썼고 초안에 동조했던 이승만 국회의장이 입장을 급선회한 것이다. ‘헌법적 권위’를 갖게 된 ‘3·1운동’이라는 용어는 그동안 수차례 걸친 헌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3·1운동의 역사성은 시민혁명의 현재성
역사적 용어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엄혹했던 우리 근대사에서 3·1운동이 지닌 역사성은 ‘운동’의 차원을 넘어 ‘혁명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기존체제를 전복한 혁명은 아니지만 수천 년 내려오던 봉건왕조의 ‘제국’에서 백성이 주인 되는 ‘민국’을 세운 역사적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다시 말해 주권재민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결정적 단초가 3·1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역사적으로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3·1운동의 결실로 그해 4월 중국 상하이에서 태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적혀있다. 황제의 통치가 아닌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천명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굽이굽이마다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중심에 늘 일반 백성들과 시민들이 앞장섰다는 역사성에 주목하자.
우리 민족의 DNA 속에는 운동성과 혁명성이 그 어느 민족보다 강하게 작동하고 있음이 ‘촛불과 태극기 집회’에서 또 한 번 확인됐다. 우리민족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용기를 보여줬다. 그 중심에 일반백성, 곧 국민과 시민이 있었다. 이 역사성을 현재성으로 되살려 나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