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 빛 시 론>

유정길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벚나무 가지를 부러뜨려봐도 벚꽃은 없다

[고양신문] 벚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 그 속엔 벚꽃이 없네 /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 얼마나 많은 벚꽃이 피는가.
- 이뀨 (일본의 선승 1384~1481) -

이뀨는 황실의 황자였지만 왕비의 질투로 물러나 스님이 되어 수많은 선시(禪詩)를 남겼다. 벚나무는 여름에는 무성한 이파리로, 가을·겨울에는 가지로, 눈에도 띄지 않았던 것이 봄이 되면 전국의 모든 나무들이 약속한 듯이 일제히 연분홍 꽃을 눈부신 망울로 한꺼번에 찬란히 터트린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이 벚꽃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급한 마음에 가지를 부러뜨려 살펴봐도 그곳에 벚꽃은 없다. 함박처럼 피어나는 탐스러운 하얀 목련꽃도 그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역시 그곳에 목련은 없다. 대추나무 가지를, 사과나무 가지를, 감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대추도 없고 사과도 없고 감나무도 없다. 시절과 계절이 무르익으면 이렇게 한꺼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동시에, 찬란히 나타나는 경이로운 광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봄이 언제나 좋았던 것은 아니다. 얼었던 땅이 녹아 진창이 된 흙길에 차바퀴가 빠지고 질척이는 길에 발이 빠지곤 한다. 오히려 단단히 얼었던 겨울이 그립기도 하다. 그러나 흙들이 부드러워지는 봄이 되어야 가장 작고 연약한 것들이 땅을 뚫고 새싹으로 피어오른다. 

벚꽃이 피기 직전까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별다른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가지 속에는 보이지 않는 여름이 쌓이고 가을과 겨울이 쌓여있었으며 드디어 봄에 잠재된 임계점의 끝에 서있던 것이다. 여기에 봄의 일점, 태양의 햇살과 따뜻한 바람, 흙의 온기와 물만 올라와주면,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트려 이 찬란한 봄의 오케스트라를 연출해 버리는 것이었다.

아낌없이 나누는 길

영성교육가인 파커파머의 표현처럼 자연은 찬란한 봄의 잔치에 온갖 형형색색의 꽃을 천지사방에 피게 만든다. 엄청난 선물공세를 하고 있다. 낭비도 이런 자연 낭비가 없다. 그래서 보이지 않던 희망을 남김없이 터뜨린다. 저장해두지 않는다. 내가 받은 고마움을 갚는 진정한 보은은 그 고마움을 다른 사람에게 모두 나눠주는 것이다. 자연은 이렇게 받은 축복을 아낌없이 나눠준다.

더욱이 1년 내내 준비한 이 오케스트라를 불과 보름 정도밖에 연주하지 않는다. 그 아름다운 아깝고 이쁜 것들을 잠깐 보여줄 뿐 아낌없이 떨어뜨려 자신이 태어난 뿌리로 흙으로 돌려준다. 꽃비로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면, 1년 동안 정성을 들여온 목련꽃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처절하고 때로는 장렬하기까지 하다. 갖고 있는 모두를 절제 없이 퍼주는 봄이다. 우리가 생명을 살리며 아름다움을 이루려한다면 움켜쥐면 안 되며 아낌없이 퍼주는 것, 흔쾌히 써버리고 가차 없이 나눠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주판알 튕기고 이익과 효율성, 능률, 목적성을 위해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영어의 ‘최단코스’로 번역되는 꿀벌이 다니는 길(Beeline)은 직선이 아니다. 지름길(Short cut)이 아니다. 우리에게 봄의 메시지는, 정말 아끼는 것이라면 아낌없이 내어주고 나누길,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계산하지 말고 공세적으로 온몸을 다해, 그리고 자신을 가차 없이 버리라고 말한다.

드디어 평화의 봄은 오는가

지금 우리는 설레는 봄을 맡고 있다. 올림픽 이전까지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를 느끼는 엄동설한의 겨울왕국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이후 갑자기 봄꽃이 피었다. 이렇게 찬란할 줄 몰랐다. 지금까지 남과 북은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잠깐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분명히 전쟁 중이다. 그래서 남과 북은 항상 전쟁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전쟁기간에는 적군(敵軍)과 아군(我軍)만 있을 뿐이다. 중간의 점이지대를 용인하지 않는다. 내편이 아니면 적이기 때문에 모든 비판세력은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자가 되어 빨갱이, 친북세력으로 매도되어 사회적 고초와 죽임을 당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인식이 고착되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도 다양성과 협력보다는 너와 나를 가르고 분리하고 나누고, 한편이 다른 한편을 제압하고 승리하는 것이 교육과 문화와 삶속에 일상화되었다는 점이다. 내 안의 분단이다.

그래서 타협과 대화라는 정치의 본령보다 이기고 지는 군사적 이해가 우선했다. 수평적 평등과 평화보다는 일사분란한 수직적 위계의 상명하복 문화만 존재해왔다. 그래서 분단은 철책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굵게 고착화되었던 것이다.

이제 곧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려한다. 종전선언을 통해 정전체제를 만들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이 얼마나 설레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필자와 함께 평화재단에서 활동하면서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함께 이루려고 했던 국면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겨울을 지나왔다. 불과 4개월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 마치 벚나무 가지에 벚꽃이 보이진 않았지만 시절이 무르익어 따뜻한 바람이 온통 벚꽃천지를 만든 걸 보며, 이 봄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래서 자연의 낭비, 나무의 무절제, 나누고 나눠서 더욱 큰 것을 얻는 자연의 지혜를 기대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서두르진 않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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