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권우 도서평론가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올해가 25년만에 다시 정한 ‘책의 해’란다. 이러면 시끌벅적해야 하는 법인데, 너무 조용하다. 책을 생산하는 사람들끼리는 이러고저러고 하는 모양이지만 시민의 반응이 영 시답잖다. 그래도 책 읽는 사회 세워보자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일을 저지른다. 얼마 전에는 청주에서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는 분들 중심으로 세미나가 있었다. 본디 진지한 얘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이런 자리에는 잘 참석하지 않는데, 한 소리하여라 해서 흰소리 안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일반인이 들으면 현실성 없다는 통박을 당할 소리지만, 전문가들에게는 고민거리를 준 발표였다는 인사치레를 들었다. 본전은 건진 셈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간단한 통계자료를 내밀었다. 2017년도에 국민독서실태조사를 했더니, 일반도서를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비율이 고작 59.9%였단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성인 10명 가운데 4명은 1년 동안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뜻인 바, 1994년 처음 조사한 이래 역대 최저치란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호들갑을 떨어야 한다고 말했다. 큰일 났다고 난리 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말, 하루라도 책을 읽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모양이다. 이유야 여럿 지적할 수 있을 테다. 인터넷 환경에 기반한 매체의 장악력, 여전한 입시위주의 교육,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는 생존전략, 저녁이 없는 일상. 원인분석은 명확하지만 해결책은 난감하다. 그래서 대뜸, 말했다. 인정하자고, 그동안 펼쳐온 모든 독서운동은 실패했다고. 오랫동안 공들이고 열정적으로 해온 것들이 결국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바닥을 치면 홀가분해지는 법이다.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때가 비로소 왔다고 강변했더랬다.

그럼, 누가 읽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요즈음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대도서관’이란 양반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하는 게임을 유튜브로 중계해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 이 양반이 한 이야기가 있어 인용했는데, 내용인즉슨 다음과 같다.

“제작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뭐가 필요하냐면 정말 많은 정보와 지식이 필요해요. 오히려 공부를 하게 돼요. 되게 놀랍거든요. 그러면서 정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저도 집에 가면 책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 정보들을 계속 얻고 싶어서 다양한 책들을 좀 더 많이 보게 되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오호, 여기 읽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제대로 보라, 그들이 누구인지. 읽으라고 억지로 끌어온 무리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 창조하는 무리가 스스로 알아서 읽게 된다. 이거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그동안 우리는 읽기의 중요성과 가치를 들어 읽으라고 했다. 안되면 이런저런 당의정을 발라 유혹하거나 점수를 주어서라도 읽게 하려고 했다. 그때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오래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말 너무 안 읽잖는가. 그러니,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읽기 위해 읽게 하려 하지 말고, 창조하게 하려 읽게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창조 또는 창작의 영역에 발 딛는 자는 읽게 마련이다.

뭇 작가의 공통된 진화과정을 보아라. 그들은 읽는 자였고, 쓰는 자이기에 여전히 읽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읽지 않는 이를 읽는 이로 이끌기 위해 이들이 창조자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

발표하면서 너무 에돌아서 미안하다 했다. 대안은 단순한데, 말이 많았잖은가. 읽으려고 읽지 말고 쓰려고 읽자, 로 관점을 바꾸면 된다. 의미의 소비자로 제한하려 하지 말고, 의미의 창조자로 전환하게 하자는 뜻이다. 읽지도 않는데 쓰자고 덤비면 다 도망가리라며 망상이라 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쓰는 사람만이 읽는 사람이 된다는 믿음을 버릴 생각이 없다.

책의 해라 무슨 책 읽느냐고 묻는 운동을 하는 모양이다. 아니올시다. 이제 물음을 바꾸어보자. 어떤 글을 쓰냐고 물어보자. 그때 비로소 책 읽는 사회를 재건할 실마리가 보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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