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자유청소년도서관, 내가 강의가 없을 때, 주로 독서하고 집필하는 공간이다. 정발고등학교 맞은 편 골목, 학생들이 담배 피우기에 적절할 만큼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1층에 세 들어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주인할머니의 착한 심성 덕분에 보증금이나 월세는 오르지 않았다. 주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작은 아들이 건물을 맡았을 때에도, 젊은 주인은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월세를 올리지 않았다. 장가도 못 가고 일자리도 없는 이 젊은 주인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참으로 초라한 건물주였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그 주인에게 개 한 마리가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진돗개와 똥개의 혼혈인 것이 분명한 이 개는 주인의 허전함을 달래는 동반자였다. 주변 사람들은 사람을 보면 짖어대는 개 때문에 귀찮아 죽겠다며 잡아먹자고 제안했지만, 주인은 가족과 같은 개를 절대로 식량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초복, 중복, 말복의 위기를 무사히 넘겨가며 늙어가는 개를 보며 어릴 시절 내가 키우던 개가 떠올랐다. 세 번이나 새끼들을 낳고 결국 개장국의 재료 신세가 되고 말았던 쎄미. 다 늙은 개를 잡아먹는 어른들을 저주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동시에 떠올랐다.

젊은 주인은 만성 당뇨였다. 스스로 살아가는 기술도, 챙겨주는 사람도 없는 이 주인은 병이 호전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주인이야 병원 밥 먹으며 치료를 잘 받으면 되지만, 홀로 남아있는 개는 누가 챙길 것인가? 주인은 지하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공장식구들에게 먹고 남은 밥을 개밥으로 챙겨 달라 부탁했고, 근처의 편의점 종업원 친구에게 기한이 지난 음식을 개밥으로 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개 산책을 시켜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아침에 인사하는 나에게 입원하는 기간 동안 개를 산책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나도 운동할 겸 개도 산책시킬 겸 개줄을 풀어 손에 거머쥐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개는 한편으로는 묶여있는 신세에서 벗어나 기뻐하면서도,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맡긴 남자의 손길을 어색해했다. 나는 평소에 내가 산책하는 길로 주인집 똥개를 끌고 다녔다. 개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는 내가 가려는 길마다 거부하며 뒷발에 힘을 주었다. 아니, 이 놈이 산책시켜주는 은혜를 버팅김으로 갚아? 개줄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개와 전쟁을 30분가량 치른 후, 개와 나는 기진맥진하여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산책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지금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지, 내가 산책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튿날, 나는 개줄을 풀며 ‘뭉개’(주인집 똥개의 이름이다)에게 말했다. 어제는 미안, 오늘은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렴. 나는 개줄을 늘어뜨리고 개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개는 기뻐 날뛰며 자신의 코스로 나를 인도했다. 로고스 교회 옆 공원에서는 한참을 낙엽을 밟으며 걷다가, 킁킁대며 낙엽을 파헤쳤다. 그리고 그곳에 똥과 오줌을 싸고 낙엽으로 그것들을 덮었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을 사뿐히 이어갔다. 그렇게 나의 길을 버리고 개의 길을 따라 동네를 도니 전혀 다른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똥개는 자연을 사랑하는 듯, 보도블럭으로 포장된 인도를 버리고 흙길로, 낙엽길로 나를 인도했다. 사람의 길이 아닌, 개의 길은 보드랍고 따스했다.

개든 사람이든, 자식이든 연인이든, 누구나 자신의 길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끌고 다녀온 것은 아닐까? 옳다고 생각하며, 가야한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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