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권우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대목이 있다. 다이아몬드가 대약진의 시기라 이름 지은 약 4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 사이 유라시아에 살던 인류의 일부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로 이동했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띠는 첫 번째 이유는 인류가 배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라시아에 도달한 다음 처음으로 인류가 삶의 범위를 넓혔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인간이 최초로 대형동물을 멸종시켰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주목할 부분은 세 번째다. 대형 포유류가 가장 많은 곳은 당연히 아프리카다. 유라시아에도 아직 대형 포유류가 많은 편이다. 아시아에는 코뿔소, 코끼리, 호랑이가 있고, 유럽에는 무스, 곰, 사자가 있다. 그런데 오늘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에는 체중 45㎏이 나가는 캥거루보다 더 큰 포유류는 아예 없다. 답은 이미 나왔다. 인간이 멸종시켜서 나타난 현상이다.

다이아몬드는 그 사정을 소상히 밝히면서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그 대형동물들이 직접적으로(먹거리를 위해 죽임으로써)도 간접적으로(인간에 의한 산불이나 서식지 변경의 결과로) 인간 때문에 전멸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정리했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대형 포유류는 선행인류와 수백만 년을 함께 진화했다. 인류 조상의 사냥기술은 한심한 수준에서 점차 향상되었다. “동물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공포심을 진화시킬 시간이 넉넉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의 대형동물은 “진화의 측면에서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발달한 사냥기술이 있는 인류를 만나는 바람에 멸종했다는 말이다.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에서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인간 선구자들이 그 신세계에서 저지른 짓”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며 오스트레일리아 정착민은 “현지 생태계에 적응한 것이 아니라 그 생태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꿔버렸다”고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약 1만5000년 전만 해도 남북아메리카에는 대형 포유류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한다. 이 시기에 미국의 서부는 오늘의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과 비슷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렵채집민이 이 대륙에 발 디딘 다음 대형 포유류는 대부분 멸종했다. 하라리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사피엔스가 들어온 다음 2000년이 지나지 않아 “북미에서 대형동물 47속 중 34속이 사라졌다. 남미에선 60속 중 50속이 사라졌다”고 한다.

두 대륙에서 인류가 저지른 멸종은 무엇을 뜻할까? 『총·균·쇠』를 읽어본 사람은 금세 알겠지만 문명탄생의 씨앗을 짓밟아버린 셈이다. 가축화한 대형 포유류와 작물화한 식물이 문명발생의 선행조건이라 다이아몬드가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가 “먹이사슬의 최상부로 올라가고 이후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가장 치명적인 종이 된 순간”이라 평가했다. 두 사람의 주장을 정리하면, 인류에게는 원죄가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그 원죄가 아니라, 멸종의 주동자라는 원죄다.

이즈음 인류세라는 말이 널리 입에 오른다. 자연의 진화적 압박을 받았던 인류가 이제 지구라는 행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 결과는 오늘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위기다. 왜 지경에 이르렀는가 되돌아보면, 인류의 원죄를 씻지 않은 데 있는 듯싶다. 하라리는 수렵채집민이 일으킨 멸종의 제1의 물결 다음에는 농업혁명으로 멸종의 제2물결이 왔고, 오늘은 산업활동이 멸종의 제3물결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속죄는커녕 거듭 죄를 지은 셈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3의 멸종은 인류 자체의 멸종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이 위기를 이겨내는 방책은 무엇일까? 간절한 마음으로 원죄를 회개하고 궁극적 구원의 길을 열어가는 종교적 심성이 우리 마음에 솟아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지배의 자리에서 희생의 자리로 내려오지 않고서는 인류의 멸종을 막을 수 없다. 그만큼 인류가 백척간두에 서 있다는 말이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