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시월이 되면 농부들은 이런저런 갈무리로 정신없이 바빠진다. 수확해야 할 작물들은 지천으로 널려있는 데다가 김장밭도 돌봐야 하고, 겨울농사까지 지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요즘 농사는 뒷전으로 농장에 여섯 평짜리 목조건물을 짓느라 열흘 넘게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최대한 근사하게 지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주머니에서 술술 빠져나가고, 들여야 할 품도 곱절 늘었다. 몇몇 벗들은 그런 내게 간단하게 하우스나 한 동 짓고 말지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안타까운 참견을 하기도 했는데 난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작년 풍동농장에서 쫓겨날 때 눈물겹도록 아까웠던 건 사 년간 유기농을 고수하며 일궈온 흙도 흙이지만 회원의 기부를 받아서 지은 텃밭도서관이었다. 비록 네 평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서관이었지만 그 공간은 농장회원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부모들을 따라온 아이들은 어른들이 농사짓는 동안 도서관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청소년농부학교 아이들도 쉬는 시간만 되면 도서관으로 우르르 뛰어 들어가서 둥그렇게 둘러앉아 책을 읽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농장에서 쫓겨나게 되자 천 권에 달하는 텃밭도서관의 책들이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텃밭도서관의 책들은 농장회원들이 귀한 마음을 모아 한 권 한 권 기증한 것이었기에 난 텃밭도서관을 빼야 하는 상황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궁여지책 끝에 텃밭도서관의 책들을 종이상자에 담아서 선배의 농막에 맡겨두기는 했지만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도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그 책들은 선배의 농막에서 깊은 겨울잠을 자고 있다.

그래서 원당에 천 평에 달하는 농장을 얻었을 때 난 나무로 근사한 텃밭도서관부터 짓기로 결심을 했고, 그 어느 때보다 기꺼운 마음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다음 주쯤 여섯 평 텃밭도서관이 완성되면 선배의 농막에 있던 책들과 함께 자유청소년도서관의 책 천여 권도 농장으로 오게 된다. 동시에 텃밭도서관에는 지렁이도서관이라는 현판이 걸리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텃밭과 도서관의 조합이 생뚱맞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농장에서 책을 읽는 건 여간 근사한 경험이 아니다. 평상이나 나무 그늘 밑에서 어른과 아이들이 어울려 오순도순 책을 읽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무엇보다 농사를 지으면서 책을 읽으면 책의 내용이 머리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곧장 몸으로 이해가 되기 마련이다. 내가 농장에 텃밭도서관을 만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풍동농장에 텃밭도서관을 만들고 나자 내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텃밭도서관 여기저기에 누워서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되자 오호라, 저 아이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가며 예술학교를 만들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되었다. 거기에는 시를 배운 적도 없으면서 농사경험을 자양분 삼아 놀랍도록 뛰어난 시를 써서 낭송하던 청소년농부학교 아이들의 모습도 크게 일조를 했다.

목조로 된 텃밭도서관을 짓고 있는 요즘에는 그 꿈이 더욱 간절해졌다.

텃밭생명을 돌보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값진 경험을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래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텃밭도서관을 짓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나는 정말로 기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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