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그림책으로 본 세상>

『너였구나』 (전미화 지음, 문학동네)

설날, 대청소를 했다.
짐으로 가득 차 곰팡이가 피려 하는 방을 숨 쉬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각종 자료와 보지 않는 책, 쓰지 않는 물건을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았다. 처음엔 뭉텅이로 버렸는데, 차츰 손이 느려지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20대 중반, 마을에서 활동하겠다고 들어간 지역 신문사에서 내가 쓴 기사를 모아둔 신문, 20대 후반에 고양시로 이사 와 몸담았던 고양청년회 자료, 30대 초반 어린이도서연구회 신입회원 교육 자료, 30대 후반 학교 밖 글쓰기 선생 시절 아이들과 쓴 글모음집, 아동문학과 그림책 공부하던 복사물, 아동심리 공부한다고 독일어 원서로 민담 공부하던 자료까지…. 참 많이 모아 놨다. 휘릭 종이 재활용 박스에 넣었다가 하나씩 다시 꺼낸다. 아무래도 이건 못 버리겠다. 나중에 국을 끓여먹더라도 가지고 있어야지.

청소를 하다말고 생각에 잠겼다. 손에 든 종이뭉치들이 그림책 『너였구나』(전미화 지음, 문학동네)에 불쑥 찾아온 한 마리 공룡 같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처음 보는 공룡이 인사를 한다.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영화도 보고, 탁구를 치지만 도무지 누군지 모르겠다. 그래서 묻는다. “너 누구야?” 그날 공룡은 밥도 안 먹고 하염없이 앉아만 있었다. 사과하고 싶었지만, 뭘 잘못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찾아간 놀이동산. 기분이 좋아진 공룡이 말한다. “잊혀진다는 게 힘들까? 잊는 게 힘들까?” 공룡의 이야기를 듣다가 순간들이 흩어지고 멈춘다. 그제야 기억 속 친구가 보인다. “아, 너였구나.” 눈을 감아 그때의 시간을 기억한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책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요즘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아졌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 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때도 있다. 눈물이 많아지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틈이 늘어났다. 이게 다 시간이 많아져서라니 그 핑계가 참 놀랍다. 꽤 오랜 기간 정신없이 살았다. 갖고 있는 직함과 직책, 한 번에 일하는 분야도 너 댓 가지여서 눈 뜨면 일하고 그러다 쓰러지면 자는 삶이었다. 해마다 연말이면 ‘내년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을 적지만, 며칠 가지 않아 또 촌각을 다투며 사는 나를 만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가 정말 그렇게 살지 않게 되는 때를 만든 것이다. 이런저런 직함들도 직책들도 내려놓고 일도 대폭 줄였다. 설이 지나고 2월이 되면 꿈에 그리던 때가 오는 것이다.

그런 삶을 꿈꾸었는데, 진짜 그런 삶을 살게 된 게 너무도 불안하다. 이러다 내 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 나는 직함과 직책과 일로 존재하던 사람인데, 그걸 확 줄이면 다들 나를 잊는 건 아닌지. 도서관 사람으로 살아온 15년을 다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때의 시간을 기억해보니 20대에도, 30대에도, 40대에도 나는 조금씩 다른 일을 하면서 존재해왔고, 지금 하는 일을 내려놓는다 해도 또 다르게 50대를 살겠구나 싶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를 기록한 종이뭉치 몇 장이 늘어나 있겠지.

박미숙 책과 도서관 대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 관장

초조함과 불안함은 익숙함을 벗어날 때 생긴 감정일 뿐. 기억에 없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때마다 종이뭉치로 남고 공룡으로 존재한다. 나중에 남을 종이뭉치와 공룡을 위해 지금 좀 더 아침을 늘어지게 자두고 좋아하는 책을 맘껏 읽자. 어차피 삶은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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