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

[고양신문] 우리 민족 5천 년의 방대한 역사를 이해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했던 유일한 역사학사 이이화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 시간이 되면 누구나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분이었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갑자기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선생님도, 나도.

작년 12월 의식을 잃으시기 바로 전날이었다. 선생님은 웃으시며 “퇴원하면 술도 끊고 담배 끊고 운동도 하고 그럴 거야. 아니 그래도 가끔 막걸리 한잔 정도는 해야지”하셨다. 체격은 작지만 손과 발이 큰 편이셨다. 못 먹어서 그랬던 것이지 체력은 원래 강하다고 주장하셨고 나도 선생님의 균형있는 몸매와 목소리로 봐선 그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선생님은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보았으니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역사를 살려내는 일에 몰두했다. 『홍길동전』의 허균을 혁명가로 되살렸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배우 류승룡 역할이 그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업적 중 가장 큰 공은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세운 일이라고 했다. TV드라마 <녹두꽃>에서 주요 사건들이 재현될 때 이야기의 전개는 선생의 의견에 따라 제작되었다.

동학혁명을 말하면 누구나 이이화 선생님을 연상한다. 정읍이나 보은은 물론 태안에 가도, 장흥에 가도 선생님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농민군의 발자취가 남은 곳이면 그 어디라도 선생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농민항쟁의 기록은 선생님의 실증적인 연구가 뒷받침 되어 재구성되었다.

억압당한 자들의 역사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은 한국전쟁으로도 이어졌다. 비록 직접 조사하고 연구하실 여력은 없으셨지만 전국의 유족들과 폭넓게 교류하시며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지원하셨다. 특히 정치적 지원은 2005년 과거사정리위원회를 탄생시켰고 이 계기는 금정굴 인권평화재단까지 이어졌다.

나는 지난해 이북에 허종호라는 역사학자가 30여 년 전 30권에 이르는 역사 총서를 집필한 책을 봤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훌륭한 학자라며 “고대사가 전공”이라고 하셨다. “한국전쟁사도 다루었던데요. 선생님께서도……”라고 하자 “그건 신 소장(필자)이 하고 있잖아”라면서 말을 끊으셨다. 국가적 지원 아래 진행되는 연구에 맞먹었던 개인적 연구. 여기에 팔십 년이나 사용한 육체에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다는 것이 지나친 주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지난해 10월 제69주기를 맞은 금정굴합동위령제에 참석했던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당시 건강한 모습으로 행사에 참석해 짧은 강연을 했다. <사진제공 =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선생님의 삶에 항상 통일의 열망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파주 헤이리 마을에는 밤새 켜져 있어야 할 전등이 꺼졌다. 방범등이 아니라면 불필요해 보이는 전등들이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상가의 불을 켜려는 주인들과 조그마한 긴장이 벌어졌고 결국 그 범인은 선생님이었음이 드러났다.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넘어갔지만 실제 선생님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밤이 되면 임진강 건너 이북의 마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던 반면 이남의 마을은 대낮처럼 밝았다. 이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쉬운 실천에 나선 것이었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 속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안의 이념적 대립, 남과 북 분단의 현실, 온갖 이해의 충돌의 존재 그 자체가 역사의 대상이고 우리의 존재 그 자체이다. 역사학자의 눈에 남과 북의 분단은 가당치 않은 한순간일 뿐이었다.

파주동화경모공원 한구석에서 “선생님, 땅속에 계셔서 이제 더 말 못하시겠네” 하는 말이 들렸다. 진관 스님이었다. 선생님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신다는 것은 워낙 유명하다. 아무리 어려운 자리더라도 ‘오늘만은 말을 아껴야지’ 다짐하시지만 5분도 미처 지나지 않아 어느새 자신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며 ‘내가 봐도 나는 못 말려’ 하셨다.

나는 삽을 들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미처 떠나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의식을 잃으시기 전날 선생님은 숨쉬기 불편하다시며 등 뒤를 두들겨 달라고 했다. 약하게라도 두들기는 것이 겁나 쓰다듬어 드렸다. 올록볼록한 선생의 등뼈가 느껴졌고 그 느낌은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다. 늦깍이 제자로서 민중의 아픔과 희망을 기록했던 선생님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