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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관계김민애 칼럼 <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 김민애 기획편집자
  • 승인 2020.05.14 22:15
  • 호수 1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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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애 기획편집자/ 독서동아리 활동가

[고양신문] 해가 뜨기도 전인 캄캄한 겨울 새벽. 광산 노동자들이 차가운 이불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잠에서 깨어난다. 40대의 아버지부터 20대 초반의 아들, 아직 초경도 오지 않은 딸아이. 이 세 사람은 바싹 마른 빵 한 조각과 보리차보다 나을 게 없는 커피 한잔으로 빈속을 채우고 새벽길을 나선다.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역력한, 누더기와 다를 바 없는 옷깃 사이로 새벽바람의 찬 기운이 스며든다. 남편과 자식 둘을 일터로 보낸 아내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빈 젖을 물린 채 이제는 맹물에 가까운 커피를 들이켜며 한숨을 내쉰다. 2주마다 지급되는 수당이 나오려면 며칠 더 남았는데 먹을 게 똑 떨어졌다. 젖 물린 아이 외에도 고만고만한 아이 다섯이 더 있는데다 병든 시아버지는 정년퇴임이 코앞이다. 총 열 식구의 생계는 유럽을 덮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입김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다.

19세기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 낸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 도입부다. 무분별한 광산 개발로 인하여 석탄 가격이 하락하자, 사장들은 쥐꼬리만 한 인건비를 또 깎는다. 토굴 작업에 따른 보강 작업이 엄격해짐에 따라 채굴양은 적어지고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 이들에게 파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광산이 망하면 그들의 삶도 무너지겠지만, 더 이상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며 살 순 없다. 이것은 살기 위한 본능이다. 쌍용자동차 직원들이 회사의 존폐를 걱정하면서도 굴뚝 농성을 하고,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쟁의를 그만둘 수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리라. 진짜 삶을 살고 싶기 때문에.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

지난겨울, 아람문예아카데미의 ‘문학으로 철학하기’ 강좌에서 『제르미날』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을’의 입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올봄, ‘프랑스 문학 완독 클럽’에서 두 번째 읽을 때는 노동자의 사회적 투쟁 뒷면에서 더욱 비참하게 그려지고 있는 여성의 삶에 주목했다. 그리고 최근 이사 준비를 하면서는 내 일상의 계급관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사업체가 소개한 곳에 입주청소를 맡겼다. 그런데 약속 시간보다 1시간 넘게 도착한 네 명의 인부 모습에 남편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전 시간에 이미 다른 집 청소를 하고 온 것인지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다. 원래는 매의 눈으로 청소 지시를 할 생각이었다. 음료수를 사러 갔다 온 사이, 늦은 점심으로 컵라면을 허겁지겁 삼키는 걸 목격하고 그 생각을 바로 접었다. 늦어서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는데 불편하다 못해 불쾌했다. 김밥이라도 사 오겠다며 가까운 백화점 식품 매장으로 달려가 이것저것 담았는데, 4만 원이 훌쩍 넘었다. 이 금액이면 차라리 청소비에 5만 원을 더 얹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계산을 끝낸 터였다. 청소는 5시간이 넘어서 끝났고 마무리가 덜 된 듯했지만 서둘러 그들을 보냈다. 그러고는 밤 11시까지 남편과 둘이서 청소를 다시 했다. 소개해 준 이사 업체에 강력하게 항의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삿짐을 빼는 날, 폐기물을 놓아두는 문제로 이삿짐 직원과 경비원 아저씨가 언쟁을 벌여서 남편이 중재를 했다. 며칠 전 경비원 자살 사건 얘기를 꺼내며 속상해 하는 아저씨를 보며 남편은 폐기물 처리 비용에 밥값을 더 보탰다. 매일 아파트를 청소해 주는 아주머니는 자기 같은 사람에게 잘해 주던 좋은 분들이 떠난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제르미날』에는 광산에 투자해 배당금으로 부유하게 사는 그레구아르 씨와 그의 딸 세실이 부르주아의 전형으로 나온다. 그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온 광산 노동자 아내에게 자신들만의 선의를 베푼다. 스카프, 장갑, 질리거나 작아서 못 입는 옷, 약간의 과자 등으로. 게으름을 부추기는 돈이나 먹을 것은 금지 품목이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나는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끼니를 놓쳐 작은 컵라면을 허겁지겁 먹던 노동자와 재계약을 위해 아파트 주민에게 늘 웃으며 인사하는 나이 지긋한 경비원과 청소 노동자. 그들에게 나는 어떤 ‘갑’의 모습이었을까.

 

 

김민애 기획편집자  webmaster@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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