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樂書)하는 여자’ 신정균 서예가

50세 이후 전국 돌며 ‘버라이어티한 삶’
‘약이 되는 글’로 마음 치료
호수공원 등 곳곳에 작품 남겨

자신만의 힘차고 자유로운 서체로 글씨를 쓰는 신정균 서예가.
자신만의 힘차고 자유로운 서체로 글씨를 쓰는 신정균 서예가.

[고양신문] 40년간 서예가의 길을 걸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낸 서예가 소엽 신정균. 그는 자신을 낙서(樂書)하는 여자’, 혹은 약글 쓰는 여자라고 표현한다. 약글이란 아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약이 되는 글을 의미한다.

1949년생인 신정균 작가는 일중 김충현, 초정 권창윤, 한별 신두영 선생에게 사사했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동아미전, 경기도전 등에서 수상했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과에서 서예요법사로 약글을 처방해 줬고, 일산 장성중학교에서는 서예 교사로 청소년들을 지도했다. 프랑스 국립미술협회주관 까르쉘 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일산 호수공원에 있는 정지용 시비 호수를 비롯해 파주 율곡선생유적지 현판, 파주시청, 국방부장관실, 국립국악원, 통일연구원 등 수 많은 곳에서 그의 글씨를 만날 수 있다. 고양미협 여성작가회 소속이기도 한 신 작가는 통일에 관심이 많아 통일연구원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비무장지대 안 해마루촌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행신동 샘터마을에서 10년간 살다 헤이리 예술인마을을 거쳐 고양시로 다시 돌아온 그를 원당에 있는 작업실 '방외소'에서 만났다. 방외소는 틀 밖을 나간 장소라는 의미다. ‘소엽이라는 호에는 젊을 소(), 잎사귀 옆()자를 써서 젊은 이파리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시종일관 활력이 넘쳤고, 방외소에는 자유로운 공기가 흘렀다.

신정균 서예가의 글을 모은 책 '약글 어때'
신정균 서예가의 글을 모은 책 '약글 어때'

서예를 시작한 계기는?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일찍 결혼했다. 중년이 너무 길 것 같았고, 아이들이 결혼하면 무엇을 하고 놀까를 생각했다. 둘째를 낳고 나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림을 하면서 서예를 짬짬이 하겠다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살림을 짬짬이 하고 있다.(웃음) 서예를 배우기 전에 여러 가지를 해봤는데 재미가 없었다. 서예는 100년을 해도 끝이 없는 분야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해 오고 있다.

세분 선생님께 배웠다. 좋은 스승을 모시고 서예 공부를 시작한 것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큰 상을 받아도 늘 뭔가 허전했다. 그래서 2003년도에 경기대학교에 서예과가 신설된 것을 계기로 그곳에 입학해서 공부했다.

고양시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나

강선마을에서 칠월칠석날 열리는 견우직녀 축제에 칠석요라는 노래를 써서 전시하고 제를 지냈다. 장성중학교에서 3년간 전교생에게 서예 과목을 가르쳤다. 고양교육청에서는 초대전을 가졌다. 여러 행사에서 가훈 써주기로 글씨 나눔을 한다. 2006년에는 호수공원에 정지용 시인의 호수라는 시를 썼다. 2절이 있는데 그것을 못 써서 지금까지 아쉬움이 크다. 시비가 있는 호수 맞은편에 2절을 쓴 시비를 세우는 게 꿈이다.

유적지, 군부대, 관공서 등 여러 곳에 글씨를 썼다.

저는 실용서예가다. 사람들이 원하면 안 가리고 나눈다. 포장마차 메뉴까지 써줬다. “벌어서 나누자, 밥상이 약상이다. 손님이 짜다면 짜다그때그때 맞춰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시는 시의 맛이 나게 쓰고, 글자는 글씨의 맛이 나게 쓴다. 저는 제 글체를 기감체라고 한다. ‘내 기와 감정으로 쓴다는 의미다. 상황에 따라 글씨의 방향이나 굵기도 다양하다. 재봉틀 글씨처럼 반듯하고 또박또박 쓰는 글씨는 제가 원치 않는다. 이걸 보고 남들은 자유체, 반항체, 막가파체라고도 한다. 글씨란 힘이 들어가 있다는 말이 제일 큰 찬사다. 못생겼어도 힘이 있으면 된다.

작년에는 책 약글 어때를 출간했다. 어떤 내용을 담았나?

15년간 서울성모병원에서 정신질환자들을 대상으로 서예요법사로 일했다. 그들을 만나면서 왜 그렇게 상처를 받고, 정신을 놓을 정도가 됐을까 안타까웠다. “과거를 섬기면 힘들 걸”, “과거는 과거에 두고 오세요등 그때 깨달아서 쓴 글들을 추려서 작년에 책을 냈다. 실제로 죽을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한테도 효과를 봤다. 몇몇 사람들은 마음에서 대못이 빠지는 것 같다고 하더라. 정신질환자에게는 의사가 아니라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표지 제목은 인쇄하지 않고 모두 제가 직접 붓으로 쓰고 낙관도 찍었다.

선생의 글을 글침이라고도 한다

글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누군가 제 글을 촌철살인이라고 표현하던데, 저는 부정적인 용어인 살인 대신 사람을 살리는 촌철활인이리고 말한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잔소리를 심하게 해서 늘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엄마가 큰 스승이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엄마 잔소리를 죽 적어봤더니 금방 70여 가지가 나왔다. 그것을 전시했고, 내가 딸한테 했던 잔소리도 전시했다.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50살에 지금까지는 가족용으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내 개인용으로 살겠다주부은퇴를 선언했다. 그해에 지프차를 샀다. 10년 동안 혼자서 전국 40km를 돌았다. 명산대찰을 시작으로 서원, 명소, 맛집을 찾고, 기인들을 만났다. 많은 것을 배웠고 에너지를 얻었다. 현재도 지프차 동호회, 클래식카 동호회 회원으로 버라이어티하게 살고 있다.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고 지혜는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학교에서 글로 배우는 것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내가 직접 체득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최고의 스승이다. 나는 찰떡같이 살 거라고 늘 말한다. 찰떡에 콩가루를 묻히면 콩떡이 되고, 깻가루를 묻히면 깨떡이 된다. 사람들에게는 목표를 세우는 것 자체가 욕심이니 목표를 세우지 말라고 한다.

돌조각도 배웠다는데

세계적인 조각가인 박찬갑 선생한테 돌조각도 배웠다. 재작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순수미술을 위한 살롱에서 조각으로 금상을 받은 분이다. 3년간 매주 영월에 가서 돌조각을 배웠다. 제 작품을 인정해 줘서 올해부터 작품을 만들고 있다. 페인트를 칠하고 돌을 깎아 글씨를 새긴다. 일산과 파주를 시작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원하면 작업을 해줄 생각이다.

나이에 비해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열정 지수로 따져야 한다. 호기심과 하고 싶다는 열정이 있으면 나이가 많아도 청년이다. 철없이, 계산 안 하고, 과거 생각 안 하고 살면 젊게 살 수 있다. 저는 뭐든지 호기심이 많고, 재미를 추구한다. 특별한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잠을 푹 자면 건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획은?

전국을 순회하며 코로나19로 힘든 사람들 마음을 약글로 치료하고 싶다. 그리고 작업실이 있는 이곳 낙타고개에 '바르래미 고개'라는 원래 마을이름표를 세우고, 호수공원에 2절 시비를, 송강마을에 비를 세우고 싶다. 루브르의 단체 살롱전에서 우리나라의 농요 헤이리소리를 써서 전시했는데, 앞으로도 농요를 채집해서 글로 발표하고 싶다. 올해 한글날에는 고창에 있는 책마을해리에서 한글 굿판을 벌이자는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대형 천에 글씨를 써서 운동장에 전시할 계획이다.

고양시민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고양시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자고 말하고 싶다. 분당은 경제를 쫓는 사람들이, 고양시는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고양시의 리더가 문화 예술 쪽으로 더 관심이 있으면 좋겠다. 저는 삶의 중심이 재미라고 생각한다. 매 순간 올인하고, 그 시간을 옹골차게 보내면 좋겠다. 허상을 따라다니지 말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생활하는 게 행복이다.

일산호수공원에 서 있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 신정균 서예가의 글씨다.
일산호수공원에 서 있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 신정균 서예가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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