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2세로 지난달 세상 떠난 선생에 대한 추모식 이달 23일
31세 때 고양서 야당 도의원
군사정권에 꼿꼿이 맞선 기백
지역민들에겐 ‘온화한 성품’
여러 책 집필하며 학구적 면모
고앙시씨족협의회 이끈 ‘어른’
[고양신문] 송암(松巖) 한익수(韓益洙)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91년의 꼿꼿한 삶을 살다가 지난 10월 6일 조용히 타계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고양에서 고양시씨족협회를 이끌며 ‘지역 어른’으로서의 한 전형을 보여준 선생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마음에 지역인사들은 11월 23일 추모식을 준비하고 있다.
선생의 삶은 한마디로 비굴함과는 먼 곧은 삶이었다. 선생의 이러한 면모는 당신이 생전에 남긴 글과 행적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때 고양초등학교를 다녔던 선생은 ‘나의 철부지 소년시절’이라는 글에서, 어린 마음에도 ‘아침조회 시간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90도 각도로 고개 숙여 절을 하는 궁성요배를 치욕이라고 여겼다’고 할 정도로 불의 앞에 스스로 굽히는 것을 꺼려했다. 또한 ‘행군할 때면 키가 큰 내가 6학년 선배들 앞줄에 서서 걸어갈 때 군가를 모른다고 걷어 채이던 수모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선생의 곧은 성품은 정치적으로 야당의 길을 걸으면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1960년 12월 경기도 제2대 도의원 선거에 31세의 나이로 민주당 후보로 나서 당선됐지만, 이듬해 5월 군사정변이 일어남으로써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도의원으로서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됐다. 불과 5개월 만에 꿈이 좌절되고 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야당의 길을 고수했고 결코 곁눈질 하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활개 치던 시절, 야당을 고수한다는 것은 온갖 정치적 탄압을 각오한다는 의미였다. 선생은 ‘불온한’ 야당 인사였다. 그러한 이유로 선생의 집에 정보과 형사들이 상주하며 감시했는데, 한날은 동네 약국까지 따라오는 경찰에게 선생은 한바탕 욕지기를 퍼붓기도 했다. 1963년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정치활동을 계속하려면 심사청구를 하라고 했을 때, “나는 심사청구를 할 만큼 과오가 없는데 무슨 심사청구인가?”라고 맞서기도 했다. 대통령 박정희의 3선을 목적으로 추진됐던 1969년 개헌 당시에는 3선 개헌을 격렬히 반대하다가 검사 앞에 서기도 했다. 그 후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고자 했으나 공천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맞보기도 했다. 어쩌면 이리 굽히고 저리 굽혀서 잇속을 챙기던 때, 세상의 혼탁에 물들지 않으려는 결벽에 가까운 성품으로 말미암은 귀결이었다. 험난했던 야당생활에 대해 선생이 말년(2019년)에 쓴 글에서는 ‘후회는 없다. 내가 택했던 길이었으니!’라고 적혀 있다.
선생은 평생 우연(于淵) 홍익표(洪翼杓) 선생을 존경했다. 홍익표(1910~1976) 선생은 광복 이후 제헌국회에서 헌법 최고위원을 역임했고, 6선의 국회의원과 장면 정권 시절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분이다. 홍익표 선생에 대한 한익수 선생의 존경은 ‘나 보다는 너, 소수 보다는 대중, 권모비리보다는 원칙을 내세우시어 몸소 실천하신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정치적 지도력, 살신성인의 정신, 언행일치의 생활철학이 높이 우러러 뵈어서 감개무량함을 금할 길이 없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래서 선생은 우연 홍익표 선생 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인의의 정치지도자 우연 홍익표 선생』이라는 전기도 집필했다.
선생은 공천 탈락 이후 정치일선에 직접 뛰어드는 대신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1회로 졸업한 서울 대신고등학교 총동문회장을 역임했고, 재단법인 덕양장학회 이사장, 학교법인 왕희학원 이사, 사회복지법인 신애원 감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선생의 생애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청주 한씨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정연하게 기록하는 족보 편찬 사업과 선현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데 힘을 쏟은 일이었다. 선생은 청주한씨문중 문양공파 족보 편찬, 문양사지(文襄祠誌) 및 청주한씨 대동족보 편찬에 힘썼고, 도유사(향교, 서원, 종중, 계중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수장)로 중앙종친회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선생은 특히 고려 말의 문신, 서예가이자 정치가인 유항(柳巷) 한수(韓脩) 연구에 깊이 몰두했으며 그의 후손됨을 진실로 기뻐한 분이었다. 2003년 유항사상연구원을 발족시켰고, 2010년에는 『유항 한선생 시집』, 『유항 사상 재조명』, 『선각자 유항 한수』 등의 저서를 펴냈다. 유항 한수뿐만 아니라 『왕의 스승 한상경』, 『아름다운 사람 공보 한계미』 같은 저서를 펴낸 것을 보면, 선생의 청주 한씨 선현에 대한 애정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선생의 이러한 면모는 청주 한씨를 넘어 고양지역의 각 집성촌에까지 미쳤다. 2006년에 고앙시씨족협의회를 결성해 초대회장에 취임한 후 『고양씨족세거사』를 편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고양씨족세거사』 편찬은 타 지역에서는 좀처럼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기획이었다. 그리고 씨족을 중심으로 한 향토사는 누군가의 애정이 없다면 그대로 묻혀버리는 사안인데, 선생은 편찬작업을 지휘하며 단단한 중심을 잡았고 끝내 결실을 맺었다. 선생은 『고양씨족세거사』 편찬을 두고 ‘고양 600년사의 징표로 길이 남을 문화유산이다. 어찌 보람이 아니겠는가!’라며 기뻐했다.
또한 선생은 고양을 빛낸 선열들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와 함께 2006년부터 매년 ‘올해의 자랑스런 고양인’을 선정했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인물이 고려충신 최영장군, 추강 남효온, 석주 권필, 양곡 이가순 등이었다.
선생은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에서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서울에서 생활한 후 70세였던 1999년 고양으로 귀향했다. 반평생 거친 야당생활을 했지만 고양의 지인들에게는 ‘온화했던 분’이었다. 이은만 문봉서원복설추진위원회은 선생에 대해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니셨다. 당신에게는 엄격했을지 모르지만 타인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게 대했다. 남들 앞에서 누군가를 야단치거나 망신을 주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노년에 책을 여러 권 편찬하시는 것을 보면 강한 내면을 지녔던 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선생이 말년에 편찬한 대종회종사와 관련된 글, 축사, 교양글 등을 모은 『송암집』의 첫 장에는 당신의 좌우명이 적혀있다. “남을 탓하지 말라”. “항상 배우는 자세로”. 이 좌우명은 선생의 91년 전 생애를 관통한 좌우명이었다. 송암 한익수 선생을 아는 이들은 훗날 선생을 어떻게 기억할까. 키 큰 신사의 풍모에 어울린 기품 있는 삶을 살았다고 여기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