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농장에서 보내는 겨울은 참으로 길고 지루하다.

오가는 발길은 기약 없이 뚝 끊기고, 잔설이 서걱거리는 텃밭은 적막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농장을 에워싼 나무들은 헐벗은 몸으로 바람조차 붙들지 못하고,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하늘은 텅 비고 느티나무 아래 야외 테이블은 하루 종일 햇볕을 쬐면서도 온기를 잃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기척에 누가 왔나, 하우스 밖을 내다보면 이웃집 개나 고양이만 어슬렁거리고 그럼 그렇지, 허전한 마음에 음악을 틀면 듣는 이는 나밖에 없다.

그럴 때면 문득 사람이 그리워져서 바깥나들이라도 하고 싶은데 행여 그 자체가 민폐는 아닐까 조심스러워서 나는 부러 오디오의 볼륨을 높이고 털썩 일거리 앞에 주저앉는다. 하지만 그런 날은 마음이 영 싱숭생숭해서 도통 일감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래도 꾹 참고 일을 하다보면 뉘엿뉘엿 해가 지고, 짙어오는 어둠만큼 외로움 또한 더욱 깊어져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돌려볼까 말까 잠시 갈등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입맛을 다시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는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화목난로 앞에 상을 펴고 앉아서 생선구이를 안주삼아 막걸리 잔에 술을 채운다.

▲ 농장에서 보내는 이번 겨울은 코로나19로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아 유난히 길고 지루하다.
▲ 농장에서 보내는 이번 겨울은 코로나19로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아 유난히 길고 지루하다.


예년 같으면 한겨울에도 여러 벗들이 번갈아가며 농장에 찾아와서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권커니 잣거니 겨울밤이 짧기만 했는데 올 겨울엔 그 모든 추억이 아스라한 옛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시내에 나가 누구를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또한 언젠간 지나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농장에서 겨울을 견딜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농장 밖으로 발걸음을 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소소하게 필요한 물건이나 먹을거리를 사러 농장 근처 마트나 편의점에 들른 것 빼고는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일산병원에 몇 차례 다녀온 게 유일한 시내 나들이였다. 간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사소견에 입원까지 해가며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가벼운 질병이라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혼자서 조마조마 속을 끓이다가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는 희소식에 여러 사람들과 둘러앉아 자축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결국 그날도 나는 농장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셨다. 그게 이 주 전이었고, 그 날 이후로 난 줄곧 농장 안에서만 머물렀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은 기억도 없고, 그 많던 송년회 소식도 접한 바가 없다. 안타까운 소식들이 연일 차고 넘치니 안부전화 한 통도 조심스럽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느티나무 앞에서 먼 하늘을 우러르며 에고, 다들 어떻게 잘 살고 있는가 몰라 하며 가벼이 한숨을 내쉬는 게 고작이다.

▲ 길고 지루한 겨울을 보내는 농장 지킴이에게 어린 거미의 발견은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 길고 지루한 겨울을 보내는 농장 지킴이에게 어린 거미의 발견은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젯밤, 하우스 안에서 저녁밥을 먹다가 뜻하지 않게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어린 거미 한 마리가 천정에서부터 거미줄을 타고 유유자적 내려오고 있었다. 이 혹한에 저 어린 거미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경이로운 마음에 넋을 빼고 지켜보는데 천정에는 얼마 전까지 없던 거미줄이 얼키설키 쳐져있었고 그곳에는 왕파리 두 마리와 모기 한 마리가 거미줄에 칭칭 감겨있었다.

그 풍경을 본 순간 나는 하늘로부터 작은 선물을 받은 느낌에 사로잡혔고, 비록 외롭고 힘들지라도 농장에서의 겨울을 잘 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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