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고양지역 구술조사 보고서」 발간한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5·25 겪은 이들이 들려준 ‘내가 기억하는 전쟁’
6개 행정동 발품 팔며 기록하고 조사하고
1·4후퇴, 제2국민병… 고비마다 치러진 희생
“올바른 지역사 복원의 초석 되었으면…”
[고양신문] 국가가 작성한 역사기록에 적혀있는 6·25가 아닌, 민간인 개개인이 겪어낸 6·25 전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쟁 중 민간인 피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신기철 (재)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이 전쟁을 겪은 고양 주민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듣고 기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한 「6·25 전쟁 전후 시기 고양지역 구술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고양시의 지원을 받은 ‘고양지역 구술조사 연구’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뒤늦게나마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올바른 지역사를 복원하고, 화해와 통합의 디딤돌을 놓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됐다. 신기철 소장을 만나보았다.
▮어떤 목적으로 구술조사 연구가 시작됐나.
35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6·25전쟁이 벌어진 지 70년이 지났지만, 놀랍게도 시·군·구 단위의 전면적인 피해 조사는 여태껏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었다. 국가가 진행한 진실화해위원회 활동도 피해가 드러난 사례에 대한 제한적인 조사였을 뿐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일부 옹진, 화순 등 지자체에서 비로소 자체적인 민간인 피해 조사가 시작됐다. 고양시도 ‘고양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근거로 구술조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조사의 목적은 분명했다. 국가의 범죄를 고발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전면적인 재앙 상황에서 고양이라는 한 지역의 주민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생존해 있는 어르신들의 구술을 통해 재구성해보자는 것이었다.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가 이제야 시작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유가 뭘까.
국가가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혀 실체적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미흡했던 것 같다. 아울러 민간인의 삶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도 부족했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전쟁 전후 한반도 모든 지역에서 민간인들도 아군과 적군 사이의 전쟁을 치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군인들이 치르는 전투를 마을에 적용해서 바라보면 모든 희생은 전쟁으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가 된다. 이것은 왜곡된 기억이다.
▮조사는 어떻게 진행됐나.
사업 첫 해인 올해는 고양동, 관산동, 삼송동, 창릉동, 효자동, 흥도동 등 상대적으로 전통 마을이 일부나마 남아있는 6개 행정동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노인회장, 통반장과 먼저 연락을 취한 후 각 마을을 직접 방문해 80세 이상 어르신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었다.
아쉽게도 코로나19로 인해 어르신들을 만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 힘들었던 것은 고양시 전역에서 도시개발이 진행돼 옛 기억을 말해줄 주민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구술에 응해주신 분들은 아주 적극적이셨다. 부족한 부분은 문헌자료와 다양한 국가기록 등을 찾아보며 보충했다.
▮조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소개해 달라.
고양동과 선유동에서 집단 희생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곳에서는 부역자 가족으로 지목된 두 집안의 50여 명이 한꺼번에 희생되기도 했다. 1·4후퇴 때 군과 경찰이 퇴각하며 남은 가족들을 몰살한 것이다. 1·4후퇴 당시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국가로부터 주민 소개령이 하달되고, 각 지역의 경찰과 대한청년단 등이 자의적 판단으로 암묵적인 학살을 집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극이 고양에서도 있었다는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확인됐다.
▮고양지역 주민들이 겪은 6·25를 어떻게 정리하면 될까.
고양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인민군이 밀고 내려와 피란을 갈 틈도 없었다. 그게 부역의 빌미가 됐고, 9·28수복 후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200여 명의 주민이 집단 희생된 비극이 금정굴 사건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든 1·4후퇴 때 또 한 번의 희생이 있었다.
학살과 함께 강제 징집도 무서운 피해로 보아야 한다. 1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노동력이 있는 남자들은 인민군에 의해 끌려가기도 했고, 1·4후퇴 때 ‘제2국민병’이라는 이름으로 차출되기도 했다. 인민군에 이용될지도 모르는 자원을 사전에 후방으로 이동시킨다는 계획 아래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전국에서 장정 수십만 명을 차출해 식량도 없이 경상도까지 걸어서 내려가게 했으니, 수많은 이들이 길에서 굶어죽었다. 고양에서도 제2국민병으로 차출된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이들은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끼리 처참한 피란 행렬을 떠나야 했고, 피란 못 가고 남은 이들은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에 떨어야 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6·25의 맨얼굴이 조금은 그려지는 것 같다.
여전히 6·25를 말할 때 전선과 전투, 전세의 변화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를 봐야 진짜 역사가 재구성되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전쟁 당시 민간인은 국가에서 돌보는 영역 밖에 있었던 것 같다. 국민들이 어디로 어떻게 피란을 가야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국가 차원의 가이드라인조차 전혀 없었다. 그나마 피란이라도 떠나려면 도민증을 발급받아야 했는데, 부역자 가족으로 낙인찍히면 도민증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보호할 가치가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국가나 지자체에 바람이 있다면.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다. 이제라도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전쟁이 낳은 비극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자. 그러려면 먼저 지역 차원에서 ‘우리가 겪은 전쟁’을 정확히 정리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보고서 발간이 작지만 첫 걸음을 떼었다는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다. 조사를 하면서 절실히 느낀 점이지만, 증언을 해 줄 분들이 많이 남아계시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보다 많은 인력과 시간을 집중해 기록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의 새해 계획은.
우선 이번에 조사하지 못한 고양시 타 지역의 구술조사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전국에서 자행된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한 연구와 조사, 집필 작업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지속된다. 지난달에도 『전쟁의 그늘』(인권평화연구소 刊)라는 신간을 ‘거짓 기록에서 찾은 6·25 전쟁 잔혹사’라는 부제를 달아 출간했다. 출판 외에도 다양한 미디어와 매체를 활용해 연구 기록들을 남기기 위한 안을 고심 중이다.
▮독자들에게 마무리 인사를 전해 달라.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는 시민이다. 일반인의 삶, 특별히 고통 받는 이의 삶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70년 전 전쟁 이야기만이 아니다. 사회적 참상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두가 함께 질문해야 한다. 새해에는 그런 일들이 조금씩 줄어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