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칼럼 [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한성우, 창비교육)

김민애 기획편집자/독서동아리 활동가
김민애 기획편집자/독서동아리 활동가

[고양신문] 대학 4학년,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취업이냐, 진학이냐. 부모님은 아들 고시 공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던 터라 차마 내 학비까지 대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눈치 보면서 공부를 해야 할 만큼 절실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글 나부랭이나 쓰겠다고 백수 생활을 선언할 수도 없는 터. 그래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출판사에 취업했다. 3년만 일해야지, 목돈 쥐면 배낭여행도 가고, 마음껏 글 써야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렇게 직원이 세 명밖에 되지 않은 작은 출판사의 계약직 편집자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계획은 계획일 뿐. 결국 12년 동안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2015년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다시 책을 만지기 시작했다. 작가를 섭외하고, 원고를 검토하고, 그림을 발주하고, 교정을 보고, 정보 페이지를 구성하고, 오탈자를 체크하는 일은 참으로 지난하다. 7번째 교정지를 뽑아도 또 눈에 걸리는 게 나온다. 자간, 행간이 틀리고, 조사가 틀리고, 외래어 표기가 틀린다. 결정적으로, 띄어쓰기는 봐도 봐도 끝이 없다. 성인 단행본이면 그깟 띄어쓰기나 맞춤법 따위,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어린이 책에서는 절대 허용하지 않는 실수다. 국립국어원과 표준국어대사전을 수백 번 뒤져 가며 용례를 찾는다.

교정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용어가 있다. 도비라, 하시라, 세네카. 도비라는 장 제목이 들어가는 페이지, 하시라는 책 하단 페이지와 책제목 또는 소제목이 표시되는 부분을 말한다. 하시라의 경우, 마스터페이지에서 일괄적으로 설정하면 절대 틀릴 일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실수가 잦다.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마스터페이지를 적용하지 않은 페이지를 끼워 넣기 때문이다. 그림 밖으로 글자가 살짝 튀어나오거나 그림에 가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아무리 프로그램이 발달해도 이런 오류는 사람이 체크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인쇄 업체와 통화하면서 내가 하시라를 언급했더니, 남편이 일본말을 쓴다고 한마디 했다.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인디자인 프로그램으로 통일된 뒤, ‘쪽표제라는 말로 바꿔 쓴다는데 입에 전혀 붙지 않는다. 도비라, 하시라, 세네카 등은 편집자 전문 용어다. 이렇게 말해야 업체도 잘 알아듣는다. , 책 좀 만지는 사람이구나, 하고 무시하지 않는다. 일본의 잔재니 이제 쓰면 안 된다고? 이렇게 해야 말이 더 잘 통하는데?

특수한 판형의 양장 책을 만들 때나 스티커 작업을 할 때 도무송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제작부 직원이 수시로 내뱉은 단어였다. 그때는 일본말을 자제해야겠다 싶어 칼선이라고 바꿔 불렀다. 스티커 각각의 모양을 따려면 목형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도무송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게 뭔가, 도무송은 도무송일 뿐.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한성우, 창비교육)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한성우, 창비교육)

며칠 전 한성우 한국어문학과 교수의 책에서 그 어원을 찾았다. 알고 보니 그 목형칼을 만드는 기계 브랜드가 톰슨이었단다. 그걸 일본인들은 도무송으로 발음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온 것. 잘못된 말이니 고쳐야 할 텐데, 이보다 입에 잘 붙는 단어가 또 있을까. 업계에서는 목형이니, 칼선이니, 그런 말보다 도무송이라는 말 한마디만 바로 알아듣는다. 일본의 잔재라 하더라도 이 말의 주인은 우리 아닌가? 특수 업종에서 보편적으로 많이 쓰는 말이라면, 표준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말로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시라, 도무송 단어를 입에 올린다고 내가 일본 앞잡이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좋은 말, 바른 말을 의식하면서 쓰는 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인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지 않을까. 결국 짜장면맨날이 표준어가 된 것을 보시라. 문득 오래전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 잘못됐다며 orange어륀지라고 발음하셨던 분이 생각난다. 아무리 원어민 발음을 익히는 게 중요하더라도 orange는 오렌지다. 다들 그렇게 쓰고 말한다. 우리 말의 주인은 미국인이 아니고 바로 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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