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취재] 불법 벌목된 서삼릉 미루나무·은사시나무길

수령 60여 년, 그루터기 지름 무려 150cm
‘모래시계’ 등 각종 드라마·영화·CF에 등장
토박이들의 추억 담긴 소중했던 상징 경관

60년대 후반 농협·마사회 목장 조성되며 식재
산림녹화 기여했던 속성수... 근래 들어 노쇠화
“새로운 가로수길 조성 논의 함께 시작해야”

나무들이 벌목된 후 휑하니 비어버린 서삼릉 진입로 풍경.
나무들이 벌목된 후 휑하니 비어버린 서삼릉 진입로 풍경.

서삼릉 입구, 60년 된 아름드리 미루나무·은사시나무가 불법 벌목된 현장은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언덕길 좌우편에 도열해 멋진 장관을 연출하던 나무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풍경은 무척이나 낯설었고, 남아있는 나무 밑동 하나하나에는 어지러운 전기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루터기의 지름은 평균 1m, 가장 큰 것은 무려 1.5m에 달했다.

나무들이 휑하니 베어진 풍경은 예전의 경관을 기억하는 방문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취재 중 우연히 만난, 원당 토박이라고 밝힌 김경일(63세, 남)씨는 “서너 달 만에 서삼릉을 찾아왔는데, 지난 가을까지도 멀쩡하게 서 있었던 나무들이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랐다”면서 그루터기만 남은 은사시나무 둥걸을 한참동안이나 살펴보았다. 안재성 고양향토문화진흥원장은 “서삼릉 은사시나무길은 많은 시민들의 각별한 추억과 애정이 깃들어 있는 장소”라며 “백주 대낮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나무가 베어진 그루터기. 줄자로 지름을 재어보니 150cm나 된다.
나무가 베어진 그루터기. 줄자로 지름을 재어보니 150cm나 된다.

거목과 목장풍경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

언덕 위에서 서삼릉 입구 주차장까지, 300여m에 불과한 짧은 길이 ‘고양의 명소’로 사랑받은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경관 때문이다. 올려다보기에 적당한 경사도로 좌우로 아름드리 거목들이 도열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입에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여기에 양 옆 나지막한 나무울타리 너머 탁 트인 초록의 젖소목장과 종마목장이 펼쳐진 풍광도 키다리 나무들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가까이에 서삼릉이라는 역사 유적이 있다는 사실도 장소의 상징성을 더해줬다.

은사시나무길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다.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며 신문과 잡지 등에 대도시 근교 가볼만한 드라이브코스를 소개하는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했는데, 서삼릉 미루나무·은사시나무길이 단골로 소개된 것. 이후 지상파TV의 한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시그널 화면을 장식하기도 했고, 사진작가들의 단골 출사지로도 각광받았다.  

2000년대 초반의 풍경. 위쪽에는 미루나무와 은사시나무가, 아래쪽에는 버드나무류가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다.
2000년대 초반의 풍경. 위쪽에는 미루나무와 은사시나무가, 아래쪽에는 버드나무류가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다.

전국적 명성… 시민들의 추억과 자부심

이렇듯 알음알음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던 서삼릉 미루나무·은사시나무길이 전국적인 명소로 부각한 계기는 1994년 국민드라마로 큰 인기를 얻었던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부터다. 이후 영화 ‘산책’, 드라마 ‘봄날’, 그리고 각종 광고영상 등 수많은 작품의 배경이 된다. 최근작으로는 확제를 모은 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한 장면이 미루나무길에서 촬영됐다.

유명한 영상작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길이 평범한 시민들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장소라는 점이다. 고양의 토박이들은 철마다 서삼릉으로 소풍을 가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연인과 친구들끼리 세수리 솔개마을에서 서삼릉까지 녹음이 우거진 호젓한 길을 산책하기도 했다.

특히 1997년 마사회 원당종마목장이 개방되고, 2010년에는 서삼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주말마다 고양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 찾아오는 나들이꾼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 방문객들은 미루나무·은사시나무길을 거닐며 영화나 드라마 속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하고, 멋진 인증사진을 찍어 카페나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모 자동차회사의 잡지에 인증사진 명소로 소개된 서삼릉 미루나무길.
모 자동차회사의 잡지에 인증사진 명소로 소개된 서삼릉 미루나무길.

60년대 이후 산림녹화 수종으로 보급

서삼릉 진입로의 미루나무와 은사시나무는 1960년대 서삼릉 능역에 목장과 진입로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식재된 것으로 전해진다. 식량증산과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박정희 정부는 127만평에 이르던 서삼릉 땅을 분할해 한양골프장, 농협과 축협, 마사회, 보이스카우트연맹 등에 분배한 바 있다. 아울러 산림녹화 총력전을 펼쳤던 박정희 정부는 빨리 성장하고 크게 자라는 미루나무와 은사시나무를 조림수와 가로수로 널리 보급했다. 

수목 전문가들은 오늘날에는 미루나무나 은사시나무를 더 이상 가로수나 녹화수로 심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장 속도가 무척 빠른 반면, 나무의 목질이 무르기 때문에 목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뿌리가 얕게 뻗는 천근(淺根)성 수목이라 수령이 오래되면 강한 바람에 쓰러지는 사고가 흔히 발생하곤 하기 때문이다.

2010년대 초반의 모습. 10여년 전에 비해 나무들이 듬성듬성해졌다.
2010년대 초반의 모습. 10여년 전에 비해 나무들이 듬성듬성해졌다.

이같은 이유로 서삼릉 미루나무·은사시나무길도 십여 년 전부터 서서히 노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블로그나 카페에 올라온 사진들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거목 30여 그루가 촘촘히 서 있었는데, 최근에는 절반 정도로 숫자가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고양시 녹지과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한 공무원은 “10년 전 강력한 태풍에 서삼릉 은사시나무와 미루나무 몇 그루가 쓰러져 군 인력을 동원해 제거작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후에도 간간이 쓰러지는 나무가 생겨 위험수목 제거작업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전기톱과 도끼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미루나무 그루터기.
전기톱과 도끼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미루나무 그루터기.

시민단체, 가로수길 재 조성 제안

서삼릉 미루나무·은사시나무길이 10여 년 전부터 노쇠의 기미를 보였다고는 해도, 이 아름다웠던 길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사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나무들이 잘려나간 안타까운 풍경을 하루빨리 수습하고, 새로운 가로수길을 조성하자는 논의도 시작됐다.

김성호 서삼릉복원추진위원회 공동대표는 “진입로 좌우편 땅의 소유자인 농협과 마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루빨리 새로운 가로수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이를 위해 양 기관은 물론 문화재청, 그리고 고양시와 함께 협의체를 만들어 대책을 논의해 나가려고 한다”고 밝혔다.

서삼릉 진입로 가로수길이 다시 조성된다고 해도 어떤 수종을 식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신중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고양문화원장을 역임한 이은만 문봉서원복설추진위원장은 “서삼릉길이 시민들에게 추억을 남겨준 장소였던 것은 맞지만, 엄밀히 말해 미루나무와 은사시나무가 왕릉 입구에 어울리는 수종이라 할 수는 없다”고 지적하며 “다시 가로수를 심는다면, 깊은 역사를 품은 서삼릉과 잘 어울리는 수종이 선택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0년대 후반의 모습. 주말이면 수많은 나들이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2000년대 후반의 모습. 주말이면 수많은 나들이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농협 젖소개량사업소.
농협 젖소개량사업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양 서삼릉 입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양 서삼릉 입구.
한국마사회 렛츠런팜 원당(구 원당종마목장).
한국마사회 렛츠런팜 원당(구 원당종마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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