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동에서 만난 노승영 번역가

생태·환경 책 “빠져들어 번역”
인지과학 전공한 환경운동가 
과학·인문학 경계 넘나들며 작업
80권 번역에도 여전히 ‘생계형’ 
 
    

[고양신문] 내가 깨끗할수록 세상은 더러워진다. 이 날카롭고 명료한 잠언은 노승영 번역가에게서 나온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환경과 생태에 대해 생각했고 올바름을 실천해왔다. 그리고 생태·환경을 주제로 한 우수한 해외 책들을 우리말로 옮겨 독자들에게 전달해왔다. 번역가와 환경운동가가 한 몸일 수 있다는 희귀한 예를 노승영 번역가에게서 본다. 그는 서울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했으며 고양으로 이사온 후에도 고양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 있다.  

그렇다고 그가 번역한 책이 생태·환경 주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학·철학·문학을 넘나드는 그 잡식성이 양산한 번역서는 출판계에서 큰 신뢰를 구축해 놓고 있다. 혹자는 그를 ‘르네상스 번역가’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번역가라도 ‘전업’으로 덤벼든다면 ‘생계형’ 번역가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2007년 전업 번역가로 입문한 뒤, ‘원고지 45매’라는 평일 하루 번역량를 꼬박 지켜오며 번역한 책의 권수가 지금까지 80권을 헤아린다. 그는 결혼하면서부터 정착한 고양에서 대부분의 책을 번역했다.  일산동구 중산마을5단지 고봉산 앞에 위치한 ‘동문재(東文齋)’에서 노승영 번역가를 만났다.  

일산동구 중산마을 고봉산 앞에 작업실을 마련한 노승영 번역가.  그는 2007년 전업 번역가로 입문한 뒤, ‘원고지 45매’라는 평일 하루 번역량를 꼬박 지켜오며 번역한 책의 권수가 지금까지 80권을 헤아린다.
일산동구 중산마을 고봉산 앞에 작업실을 마련한 노승영 번역가. 그는 2007년 전업 번역가로 입문한 뒤, ‘원고지 45매’라는 평일 하루 번역량를 꼬박 지켜오며 번역한 책의 권수가 지금까지 80권을 헤아린다.

한 사람이 번역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번역한 책들의 장르가 다양하다. 식물학부터 진화생물학, 생태학, 경영학, 철학, 인공지능(AI)까지 장르를 능란하게 넘나들고 있다.  

본인의 전공분야에 속한 책을 전문성을 가지고 작업하는 번역가가 있는 반면 나처럼 여러 분야의 책을 다루는 번역가도 있다. 이 두 가지 성격의 번역가는 제 각기 장단점이 있다. 나 같은 전업 번역가는 전문 분야의 책이 꾸준히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까 일거리가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학창 시절 다양하게 공부했다는 점에서도 여러 분야의 책을 다루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는 고교 때 이과를 전공했다가 재수를 하면서 문과로 바꿨다. 대학교 학부 때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 때는 인지과학을 전공했다. 인지과학은 문과와 이과가 혼재하는 학문이다. 그런 학문을 공부하다 보니 관심 분야가 다방면으로 이어졌다.    

뇌과학, 컴퓨터과학, 인지과학과 관련된 책을 번역하기도 했는데.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라는 책이 대표적이다. 원저자인 대니얼 데닛은 철학자이면서도 인지과학, 뇌과학, 컴퓨터과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독특한 학문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다. 내가 대학원 때 인지과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 책을 쉽고 깊게 번역할 수 있었다라고 생각한다. 


『흙을 살리는 자연의 위대한 생명들』, 『노르웨이의 나무』, 『나무의 노래』 등 숲이나 자연, 생명에 관한 책을 많이 번역했고 호평을 받았는데.  

책 중에서도 나와 생각이 다른 경향의 책은 번역하기가 아무래도 힘들다. 반면 ‘정말 내 생각과 같구나’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빠져들어서 번역하는 책이 있다. 생태·환경과 관련된 책들이 그렇다. 생태·환경 관련 책을 번역하는 일 자체가 환경운동에 동참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이러한 책들은 독자들에게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내가 번역한 책에서 번역자로서 스스로 소개할 때 사용하는 말이 있다. ‘내가 깨끗할수록 세상은 더러워진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대학 다닐 때부터 마음에 담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맞아떨어지는 방향으로 세상이 점점 바뀌고 있다. 인간이 저질렀던 잘못을 받아주던 자연이 언제부터인가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고 있다.   

번역한 생태·환경을 주제로 한 책 중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은.
 
 『숲에서 우주를 보다』라는 책이다. 대학교수인 저자가 대학 건물 뒤에 있는 숲 속에 가로 세로 1m라는 특정 공간을 지정해놓고 1년 동안 매일 관찰하고 성찰한 결과를 일기처럼 기록한 책이다. 이 좁은 공간에도 자연의 풍성한 움직임과 싱싱한 기운이 있는 일종의 만다라의 세계라는 점을 알게 해준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시간에 따라 삼라만상이 펼쳐지는 세계에 대한, 진화생물학과 생태학을 공부한 저자의 과학적 배경지식과 영적인 깨달음이 잘 결합한 책이다. 숲을 좋아하는 분은 당연히 이 책을 즐겁게 읽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키가 작은 사람들을 위한 온갖 잡다한 지식을 망라한 흥미로운 책 『숏북』(양문, 2010)은 처음으로 직접 발굴한 책으로 알고 있다. 출판사가 의뢰한 책이 아니라 관심 가는 원서를 직접 발굴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번역가가 보통 출판사가 쥐어주는 책만을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래서 좋은 원서를 직접 찾아서 번역을 해보겠다고 출판사에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출판사는 지명도가 떨어지는 초창기의 번역가를 무작정 믿고 책을 맡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번역가가 원서와 함께 직접 작성한 번역 검토서를 여러 출판사에 제안해서 일을 맡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 출판사에 먼저 제안해서 번역한 책이 5~6권정도 된다. 『숏북』 외에 『대중문화의 탄생』, 코카콜라, 브리티시 석유 등 세계적 기업의 광범위한 기업홍보의 배후와 의도를 파헤치는 책인 『스핀 닥터』도 그러한 책 중 하나다. 

하루에 원고지 몇 장정도 분량을 번역하나.  

하루에 45장 정도를 번역한다. 하루 원고지 45장 번역은 되도록이면 지키려고 하다. 번역일이 1권에 보통 2~3달 정도 작업에 매달려만 하는 장기적인 일이다. 번역이 늦춰지면 이후 모든 일정이 늦추어져 결국 책 출판이 늦어지고 나에게도 생계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내가 정해놓은 1일 작업량을 채우려고 한다.    

‘번역가는 실력이 아니라 속력에 따라 보상 받는다’고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에서 말했다. 여기서 보상을 받는 쪽이 독자가 아니라 번역가 본인으로 읽힌다. 그런데 독자들의 만족은 번역가가 좋은 번역을 위한 노력에 들인 시간에 비례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그런데 ‘번역가는 실력이 아닌 속력에 보상받는다’는 말은 생계형 번역가의 입장에서 내가 번역가 지망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번역가가 완벽주의자라서 문장 하나를 번역하는 데 며칠을 고민해서 좋은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해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한국의 번역시장에서 번역료는 10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출판 자체가 사양 산업으로 접어든 지 오래됐다는 현실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 어려운 책을 공들여 번역하는 것보다 쉬운 책을 술술 번역하는 편이 생계에 훨씬 보탬이 된다. 완벽주의에 입각한 번역은 다른 직업을 가져서 생계가 어느 정도 해결된 분들에게는 요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계형 번역가에게 요구하기는 어렵다. 전업 번역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으면 풍족하게 먹고 살겠다는 희망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번역가로서의 직업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 나름대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번역가의 자질이 있다. 독자가 책의 첫 장을 넘겼다면 그 책을 독자가 끝까지 읽게 만들도록 번역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읽다가 중간에 읽기를 그만둔다면 그 뒤의 내용은 독자에게 의미가 없어진다. 결국 그 책의 진가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사장시키는 일이 되는 셈이다. 책과 독자를 소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번역가다. 책과 독자를 훌륭하게 소통시키는 일은 책에게도 좋은 일이고 독자에게도 좋은 일이다. 

번역 작업을 할 때 가장 고통을 느끼는 때는 어떤 때인가.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점 때문에 도저히 번역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났을 때다. 사실 어떠한 문장도 100% 온전히 한국어로 옮길 수는 없다. 영어를 읽는 독자와 한국어를 읽는 독자가 처한 환경과 배경지식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영어 문장으로서는 유머러스한 데 한국어로 옮겼는데 웃기지 않으면 번역자로서 난감하다. 이 문장이 왜 웃기는지 각주를 달아서 설명해야 할 때는 자괴감도 느낀다. 또한 영어 한 단어에 적절한 한국어 한 단어를 1대 1로 연결할 수는 있지만, 그 특정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범위도 영어와 한국어는 다르기 때문에 번역이 어렵다. 그래서 100% 온전히 한국어로 옮기지는 못하더라도 70% 정도라도 옮기려고 노력하지만, 이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문장이 있다. 그러한 문장의 번역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번역자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책 한 권을 번역할 때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영어문장에 딱 들어맞는 한국어 문장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에는 번역가 끼리는 적어도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인맥을 쌓을 필요도 없고, 서로 경쟁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는데, 실제로 번역 실력 차이나 수입 편차에 따른 부러움이 있을 수 있지 않나. 

번역가들 사이에 수입 차이가 거의 없다. 번역가가 번역한 책을 출판사가 더 비싸게 팔면 번역료를 더 줄 수 있겠지만 특별히 비싸게 팔지 않는다. 또한 번역한 책이 많이 팔린다는 보장도 없다. 번역을 잘해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책의 판매량을 좌우하는 변수는 번역 하나가 아니라 워낙 많다. 번역료란 출판사가 책을 팔아서 얻는 수익의 일정부분인데 번역가에게 수익을 많이 주면 다른 부분에서 비용이 더 들어가게 된다. 경력이 쌓이고 실력을 인정받는 번역가라 하더라도 출판사가 특별히 번역료를 더 올려주지는 않는다. 사실 번역 실력이라는 것도 1등에서 꼴찌까지 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닌 애매한 것이다. 그래서 번역가는 실력이 아닌 속력에 의해 보상을 받는다는 말을 하게 된다.  

번역가로서의 삶이 작가 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번역을 하면서 일상적인 삶에 만족하는 성격으로 점점 바뀌는 것 같다. 번역가의 삶이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붙어 있는, 굉장히 단조로운 삶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극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경우가 적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과의 삶에서, 그리고 내가 번역하는 책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자극적인 즐거움을 찾기 시작하면 더 자극이 강한 즐거움을 찾기 마련이고 결국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닌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자극이 강한 즐거움을 피할 수 있었고 오히려 작은 것이나 섬세한 것들의 차이를 발견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작은 것들이 가지는 차이의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텃밭에 싹이 트고 열매가 맺히는 걸 보는 것, 이것으로 다른 어떤 것보다 큰 만족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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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승영 번역가가 독자에게 추천한 번역서 5권


『향모를 땋으며』 (에이도스, 2020년)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출신 여성 식물생태학자가 식물학적 지식, 원주민 신화와 문화, 삶의 지혜와 철학, 자연을 대하는 겸손한 과학자 언어와 태도가 고스란히 담긴 에세이다. “세상 속에 나의 자리를 선사한 것은 여름내 아침마다 이슬 맺힌 잎 아래에 열린 야생딸기였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 세상이 온통 선물로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인디언 부족의 전통과 토착적 지식이 어떻게 과학과 연결될 수 있는지, 인간과 자연의 호혜적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과 성찰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수놓았다. 

 

『시간과 물에 대하여』 (북하우스, 2020년)

아이슬란드 소설가인 저자가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이야기’ 형식을 빌려 이해시키고 있다. 이야기 속에는 신화와 역사, 개인적 일화와 대화, 과학자들과의 인터뷰, 달라이 라마와의 대담이 담겼다. 빙하학자, 해양학자, 지리학자들의 인터뷰와 조언을 기초로 이야기를 꾸몄기에 과학적 근거도 명료하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독자로 하여금 피부로 느끼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노승영 번역가는 “내가 번역한 책 중에서 독자들이 자기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는 책 중의 하나”라고 말한 책이다. 

 

『생산적 의견 대립』 (학고재, 2020년)

우리 사회의 대화가 서로 의견 차이만 확인하고 대립각을 세우는 쪽으로만 흘러가고만 있다. 이것에 대한 개선의 여지는 없을까. 이 책의 저자는 난감하고 소모적인 갈등의 심리적 근거를 밝히며 생산적인 토론과 비생산적 논쟁을 가르는 요인을 설명한다. 그리고 의견 대립을 생산적으로 만들어가는 ‘생산적 의견 대립’을 통해 갈등에서 소통으로 이끌어가는 8가지 기술을 소개한다. 이 책은 독자를 더 나은 친구, 더 유능한 직원, 더 다정한 배우자, 더 실천적인 세계 시민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나무의 노래』 (에이도스, 2018)

퓰리처상 최종후보에 올랐던 『숲에서 우주를 보다』 저자의 두 번째 책. ‘우리 시대 최상급 자연문학 작가’로 평가받는 저자가 아마존 열대우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지역, 스코틀랜드, 동아시아 일본 등 전 세계 12종의 나무를 관찰하고 기록한 책이다. 세균과 균류, 동식물과 미생물 그리고 인간이 서로 대화하며 소통하는 생명의 연결망으로서의 나무들에 얽힌 차분하고 치밀한 과학적 탐구가 녹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시선 못지않게 시적이고 우아한 문장, 인간과 자연에 대한 눈부신 통찰도 선사한다.

 

『노르웨이의 나무』 (열린책들, 2017년)

노르웨이 출신 저자가 ‘장작 패기의 기술’에 대한 지혜를 풀어놓은 책이다. ‘북유럽 스타일로 장작을 패고 쌓고 말리는 법’이란 부제처럼 어떤 계절에 어디서 나무를 베어야 하고 나무의 종류에 따라 장작의 특성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장비를 어디서 구입해야 할지 등을 꼼꼼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흥미로운 통찰은 단순한 실용서를 훌쩍 뛰어넘는다. 장작이 타면서 내는 불꽃과 소리에 치유의 힘이 있고, 장작 패기처럼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 현대의 다른 직업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그렇다. 유럽 19개국에서 60만부 넘게 팔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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