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마음이야기-
[고양신문] 나는 조용조용 설명한다. 당신은/ 고함치는 말로 듣는다. 당신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다. 나는/ 오래된 상처가 들추어짐을 느낀다.
당신은 양면을 본다. 나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당신을 본다. 나는/ 달래주려고 한다. 당신은/ 새로운 이기심을 느낀다.
나는 비둘기다. 당신은/ 매로 보인다. 당신은/ 올리브가지를 내민다. 나는/ 가시를 느낀다.
당신은 피를 흘린다./ 나는 악어의 눈물을 본다. 나는/ 뒤로 후회한다. 당신은/ 공격을 받고 비틀거린다.
로저 맥거프의 ‘당신과 나’라는 시다. 우리의 속내를 잘 표현했다. 서로가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제대로 들을 수만 있다면 분쟁은 없을 텐데, 부조리는 인간사의 기본인가.
어느 날, 한 교회 사무실에 장애인 걸인이 들어왔다. 이름도 알 수 없지만 수시로 찾아와서 손에 들고 있는 수세미를 사달라며 들이미는 장애인이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악취가 날 것 같은 남루한 행색이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지 삐뚤빼뚤 쓴 읍소형 판매 쪽지를 들이미는 게 그의 언어였다. 여느 때처럼 쑥 들어와서 같은 방식으로 그날따라 바쁜 간사를 자극했다. 교회 행사로 분주했기에 간사는 신경질적으로 말해 버렸다. 오늘은 바쁘니 다른 날 오라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면 눈치 봐서 돌아가고 다시 찾아오면 그때는 간사가 자기 돈을 털어 수세미를 사지 않겠는가. 나라면 그랬을 텐데, 그 말에 불쾌했던지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자기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나름 세게 내리치는 것 같았는데 본인이 화가 났다는 표현 같았다. 본인이 본인 머리를 때리고 서 있는 장면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간사는 말리고 싶지도 않은지 멍하니 쳐다보았다. 손님으로 앉아 있던 나도 어쩌지 못했다. 내가 봐도 어이없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정신을 차린 이가 하나 있었으니 교회의 부목사였다.
“왜 자해를 하세요! 왜!”
목사의 혼쭐내는 고함에 잠시 당황한 장애인은 두려움을 느꼈는지 행동을 멈추고 또 수세미를 들이밀었다. 결국 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지갑을 열어 수세미를 사주고 잘 가라며 내보냈다. 부목사도 나가고 정적만 남은 사무실은 남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라도 있는 듯했다. 간사가 말했다.
“천사표시네요.”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었다. 그래서 손사래를 했다.
“저분은 저것만 배운 거죠. 저렇게 하면 사람들이 놀래서 얼른 사주었을 거예요. 제가 천사표가 아니라 저분이 저렇게 밖에 못하는 게 느껴져서요.”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가 시작된 지가 얼마 안 되었으니 아마도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을 것이다. 제도권 안의 우리와는 삶의 방식이 많이 다를 것이다. 비슷한 이들끼리 거주하고 있을 테니 낮은 지능과 교육의 부실이 일반인과 소통할 수 없는 진짜 장애인을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만약 그들의 언어를 알고 있다면 모를까 앞의 에피소드는 다반사다. 단지 장애인 얘기뿐인가. 뉴스에 노사갈등, 분규, 파업 얘기가 없는 나라가 있을까.
큰 아이가 만3세에 장애아 판정을 받았을 때 세상이 이등분으로 느껴졌었다. 누군가 말을 걸라 치면 화살을 꺼냈다. 뾰족하게 날을 갈아놓은 화살들을 상대에게 쏘아댔다. 그래도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따스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올리브가지를 받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21세기 들어 대한민국은 가치관의 변혁을 경험하고 있다. 평등이라는 단어, 공정, 정의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인권, 권리, 자유라는 말이 따라붙어 각종 교육에 등장한다. 전에는 노인을 공경하라는 캠페인 정도였다면 이제는 성소수자를 존중하고 여직원에게 업무 외의 말을 걸면 되지 않는다는 강의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
우리의 불완전한 언어는 애당초 이런 것들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빨리빨리 건물은 지을지 몰라도 사람의 의식이 단기간 내에 바뀔 수 있겠는가. 건강한 이는 아픈 이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다. 여자가 남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고 중년이 10대 청소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싸우기만 할 텐가. 상처받을 준비만 할 텐가. 봄이다! 선인장도 꽃을 피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