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봄비가 내리고 나서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연일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새벽에는 된서리까지 내렸다. 해가 쨍한 한낮에도 두 뺨에 스치는 바람이 선득하고 외투의 옷깃을 여미는데도 어, 추워 소리가 절로 난다.

그런데도 발길은 자꾸만 텃밭으로 향한다. 매서운 바람에도 텃밭을 둘러보면 활짝 피어난 꽃들이 화사한 빛깔을 뽐내며 깊은 산골의 우체부처럼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소복이 피어난 냉이꽃은 텃밭과 두둑을 하얗게 물들이고, 영하 이십 도를 넘나드는 혹한을 견디고 살아남은 얼갈이배추는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냉이 못잖게 봄 입맛을 돋우는 꽃다지도 열십자 모양의 노란 꽃잎을 손수건처럼 흔들어대고, 겨울옷을 벗은 움파에도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웃한 매실농장에는 매화가 만발했고, 농장 주변에 병정처럼 늘어선 목련나무 가지엔 새끼손가락 크기의 꽃망울들이 불을 붙이지 않은 폭죽처럼 매달렸다.

 

농장에 핀 얼갈이배추꽃.
농장에 핀 얼갈이배추꽃.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봄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십대 후반에 맞이했던 어느 봄날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양화대교를 건너가는 버스 뒷좌석에 멍하니 앉아서 넘실넘실 서해로 흐르는 정오의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 공원과 도로를 나누는 경사면에는 샛노란 개나리꽃이 흐드러졌고, 군락을 이룬 수양버들의 가지들은 연녹색 물결을 매달고 낭창거렸다. 봄 햇살이 나른한 공원길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사뿐거리고, 넘실거리는 강물은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는 금빛햇살로 반짝거렸다.

왜 그랬을까, 그냥 차창에 얼굴을 대고 그 모든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주위 사람들이 그런 내 얼굴을 힐끔거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시선쯤 아무래도 좋았다. 내 눈길은 차창 밖 풍경에 붙박였고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아, 이토록 찬란한 봄이 존재했구나.

너무도 명징한 생각 한 줄기가 눈앞에 휙 스치는 동안 시간은 정지했고 그 이후의 기억은 내게 없다.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양화대교를 건너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그날 내가 울었던 건지 웃었던 건지 고개를 갸웃거려보지만 도통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긋이 눈을 감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저녁밥 짓는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긴장이 풀리면서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꽃피는 봄이 오면 가만히 꽃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어느새 내 몸은 양화대교를 건너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있고 내 바로 앞좌석에는 이십대의 내가 앉아있다. 젊디젊은 나는 거친 길을 정신없이 내달리느라 그 날의 기억을 오랫동안 잊고 살다가 사십대 후반에 만개한 쑥갓꽃 앞에서 문득 아, 그런 순간이 있었지 하고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일은 여전히 녹록지 않지만 한번 맛본 찬란함의 기억은 삶의 뒤안길에서 아픈 배를 어루만지는 할머니의 손길처럼 따스한 위로가 된다. 돌이켜보면 찬란함의 기억은 사소한 일상에 늘 존재하는 것 같다. 하등 새로울 것도 없는 나물 반찬 한 가지에 아, 감탄하는 날이 있듯이….

하루하루가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요즘 하늘거리는 꽃송이 앞에서 모두가 찬란함과 마주하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다.

 

냉이꽃
냉이꽃
이웃 농가의 매실나무에는 매화가 만발했다.
이웃 농가의 매실나무에는 매화가 만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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