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공릉천변에 조선 선조 때 문신인 송강 정철선생의 시비(詩碑)공원이 있다. 왜 시비공원이 공릉천변에 만들어 진 것일까. 바로 이 곳이 송강이 만년에 낙향하여 가사를 지은 고향땅이기 때문이다.
신원동에는 송강에 얽힌 설화가 많다. 송강보, 송강 낚시터도 있다. 조상들의 뼈가 묻힌 선영이 가까이 있고 전라감사로 있을 때 사랑한 강아의 묘소가 건너다보인다. 송강의 묘소는 조선 숙종 대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에 의해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로 이장되면서 강아의 묘소는 그대로 남게 됐다.
강아와의 사랑은 송강의 로망스다. 시비공원 안에 송강이 처음 강아를 만났을 때 지은 시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一園春色紫薇花 / 纔看佳人勝玉釵 / 莫向長安樓上望 / 滿街爭是戀芳華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송강은 만년에 고향인 공릉천에서 유유자적하며 4년 동안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송강은 이미 강원감사로 있을 때 불후의 명작인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지 않은가. 목민관으로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효제충신의 덕목을 교화한 것도 이 시기다.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 두곳 아니면 이 몸이 사라시랴 / 하늘갓튼가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 님금과 백성과 사이 하늘과 땅이로다 / 내의 셜운 일을 다 아로려 하시거든 / 우린들 살진 미나리 홈자 엇디 머그리 /형아 아애야 네 살할 만져 보아 / 뉘손듸타 나관데 양재조차 가타산다 / 한졋 먹고 길러나 이셔 닷 마음을 먹디 마라 / 어버이 사라신 제 셤길 일란 다하여라 / 디나간후면 애닯다 엇디하리 / 평생(平生)애곳텨 못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하략)
풍류를 사랑하면서도 대쪽 같은 성품은 공직사회의 불의를 용서하지 않았다. 중봉 조헌은 “오로지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며 강개한 곧은 말만 하기 때문에 백관들이 두려워한다”고 했다. 사계 김장생은 송강을 군자라 평가하면서, 그를 비난한 자를 소인이라 지목하기도 하였다. 백사 이항복과도 매우 절친했는데 조정의 비난이 있을 때는 앞장서서 송강을 두둔하기도 했다.
후학인 영의정 신흠은 송강을 이렇게 평하였다. ‘선생은 평소 지닌 품격이 소탈하고 대범하며 타고난 성품이 맑고 밝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송강시비공원은 30년간 전 고양시사편찬상임위원을 역임한 이은만 회장의 헌신적 공이 크다. 이 회장이 사비를 들여 또는 독지가의 지원을 받아 민간 차원에서 아름다운 시비공원을 조성 한 것은 전국에서도 전무후무하다. 현재 시비 12개가 완성되어 있다. 앞으로도 18개는 해야 마무리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있어야 할 송강문학관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송강의 유물을 전시하는 유물관도 없다. 필자는 고양시에 송강의 효 정신을 선양하는 문학관, 효사료관과 국악당을 제안하고 싶다.
송강 유적 인근에 조선 성종 대 제일 풍류 시인이었던 월산대군 사당과 묘소가 있다 월산대군의 한시 ‘창밖에 국화를 심고..’는 흥타령의 대표격이 아닌가. 두 분의 유적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고양시는 이 곳을 송강문학의 성지로, 국악운동의 심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호 송강의 시혼이 살아나고, 월산대군의 국악 향기가 울려 퍼지는 날 고양시의 품격도 높아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