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정수남 소설가. 일산문학학교 대표
 정수남 소설가. 일산문학학교 대표

[고양신문] 최근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심화된 중국과의 경제적 갈등을 위구르족 인권 탄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제재를 감행했다. 더불어 북한의 인권 유린과 침해 사례를 기록하고 보존하여 차후 책임자 처벌에 나설 것까지 시사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소위 동맹이라고 일컫는 우리까지 싸잡아 이미 법률로 제정한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한 청문회까지 열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분명 힘을 앞세운 폭력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평화의 사도를 자처하는 미국은 마치 자신들이 행할 일을 마땅히 했다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계속 견지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미국은 합중국(合衆國)이다. 즉,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공화국으로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한데 뒤섞여 있는 세계 최대 다민족국가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미국의 성장을 이끌어온 동력은 모두 다민족들의 힘이었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물론 업적을 놓고 논하자면 영국과 독일, 아일랜드계 등 백색인종이 우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필리핀인, 멕시코인, 쿠바인, 유대인, 히스패닉 등의 업적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노예로 팔려와 짐승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미국 성장에 기여한 아프리카 흑인들을 빼놓을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 사회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외양으로 볼 때 다민족이 융합된 미국사회의 문제점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인권 문제로 넘어오면 문제는 달라진다. 지금도 미국은 잇달아 터지는 아시아계를 향한 무차별 폭력행위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으며, 또 빈번히 일어나는 흑백 간의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권을 빙자한 미국의 폭력 행위가 비단 어제오늘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이는 미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권력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집단 간의 싸움, 인종 간의 갈등과 분쟁은 멈출 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단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온 청교도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1만2000년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힘으로 무자비하게 제거했으며, 노예로 유입된 아프리카 흑인들, 그리고 자신들처럼 꿈을 안고 이주한 유색인종들까지도 학대하고 차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디 그뿐인가. 영국과의 독립전쟁도, 노예해방을 이끈 남북전쟁도, 또 1893년 미국거류민들이 주도하여 무너트린 하와이 왕국의 왕정도 모두 폭력을 앞세워 이룬 역사적 산물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무자비한 폭력성은 작금에 들어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패권주의와 이념적 갈등을 넘지 못해 일으킨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도 결국은 힘을 우선하고 인권을 도외시한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손에서 총칼이 멀어진 날은 없었다.
 
또 하나, 미국이 인권에 앞서 힘을 우선한다는 것은 미국을 상징한다는 흰머리독수리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흰머리독수리는 주로 물고기를 사냥하지만 조류나 파충류, 포유류 등도 가리지 않고 포식하는 것은 물론, 썩은 고기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때로는 그들의 최대 경쟁자인 물수리가 사냥한 것까지도 강제로 약탈하는, 수리과에서는 최상위에 속하는 대형 맹금류이다. 한마디로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하늘의 폭군인 셈이다. 그렇다면 힘과 용기를 갖췄다는 이유 하나로 그 새를 국조로 지정한 미국의 속셈은 무엇일까. 미국을 보면 흰머리독수리가 떠오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물론 미국이 그동안 지구촌에 끼친 인권에 대한 업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최대 핵심가치로 내세우고 당선된 바이든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 탄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힘으로 찍어 눌러 얻은 그 인권이 과연 얼마나 지탱할까. 또 겉에 드러난 그 업적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민족들의 짓밟히고 있는 인권은 어찌할 것인가. 인권 탄압은 특정 인종에 대한 적대감을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배타주의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도 평화의 사도를 가장한 바이든의 미소 뒤에 감추어져 있는 북쪽 인민들의 기아는 그대로 무시당해도 되는 것일까. 대북제재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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