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작년 봄에 나는 참외 모종을 삼십 주 심었다.

당시에는 농장에 이러저러한 시설작업을 하느라 돈이 많이 필요했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나는 농산물 꾸러미 회원을 모집해서 그 비용을 마련하고자 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회원으로 가입을 해주어서 그 비용으로 농장에 여러 편의시설을 만들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참 신바람 나는 시간들이었다.

농막과 텃밭도서관과 야외테이블과 생태화장실이 하나 둘씩 자리 잡을 때마다 나는 그 모든 걸 가능하게 도와준 농산물꾸러미 회원들에게 맛있는 농산물을 풍성하게 보내주어야겠다는 다짐에 한껏 부풀곤 했다. 참외 모종 삼십 주를 심으면 매주 참외를 한 소쿠리씩 수확할 수 있다. 오이소박이도 양껏 보낼 요량으로 오이모종을 삼십 주 심었고, 애호박도 생과뿐만 아니라 묵나물을 만들어 한 상자씩 보내리라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넉넉하게 모종을 심었다.

그런데 모종을 심고 다음 날 농장에 나오면 어라, 모종 서리꾼이 있는 것도 아니겠고 애써 심어놓은 모종이 남김없이 사라지곤 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 추적에 추적을 거듭한 결과 범인은 고라니였다. 애써 화를 누르며 새로 모종을 사다가 심으면 녀석은 우후, 신바람을 내가며 남이야 속이 썩어 가든 말든 양껏 배를 채웠고, 종당에 나는 꾸러미회원들에게 전후사정을 카톡에 알린 후 대체 작물을 보내야만 했고 우리 가족은 참외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맘 같아서는 빵야빵야 공기총이라도 사고 싶었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어쩌랴 싶은 마음에 단전호흡을 해가며 함께 살아갈 길을 봄부터 가을까지 모색해가며 속을 끓였는데 초겨울 어느 날, 익숙한 고라니 한 마리가 농장 앞 하천에 떨어져 죽은 채 발견되었다. 하천을 뛰어넘다가 실족사를 했을까, 참혹하게 죽은 녀석의 사체를 봤을 때 나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음이 아프다고 해야 할지 마음을 정리하는데 오랫동안 애를 먹어야만 했다.

지금도 아리송하기만 한데 눈이 내리는 겨우내 농장을 지키면서 나는 녀석의 발자국이 눈밭에 찍히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봄이 오도록 눈밭에는 이웃 농가의 개와 야생고양이만 어슬렁거렸고 고라니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새봄을 맞아 참외와 오이와 애호박 모종을 심었다. 그런데 어인 까닭인지 넝쿨작물 모종들이 시름시름 몸살을 앓아가며 하나 둘 생을 마감했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 고개를 갸웃해가며 죽은 모종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싱싱한 모종을 이식했지만 모종은 또다시 생을 마감하고, 오늘도 나는 넝쿨작물 모종을 대여섯 개 이식을 해야만 했다.

난생 처음 겪는 기현상에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인데 그간의 경험을 총동원해서 원인을 따져보면 유난히 혹독했던 봄추위 탓이 아닐까 싶다. 고라니만 없으면 마음 편히 농사지어서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거라고 한껏 기대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를 만난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씨가 풀리고 사흘간 흠뻑 내린 봄비에 새로 심은 넝쿨작물 모종들이 기지개를 켜며 무럭무럭 자리를 잡아나간다는 사실이다.

조금씩 넓어지는 넝쿨작물의 잎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살아도 시간은 힘겹고, 힘겨운 시간을 견디면 그냥저냥 햇살은 비추고 우리의 삶도 저 잎사귀처럼 펼쳐지고. 그게 무엇인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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