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풀이 자란다.
장마에 접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연일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기온은 오르지 않고 일조량마저 부족한 탓에 작물들은 도통 기를 펴지 못하는데 풀들은 그야말로 신바람이 났다. 밭마다 두텁게 낙엽을 덮어두었는데도 풀들은 돌 맞은 벌집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 말벌 군단처럼 텃밭을 뒤덮고 세를 불린다.
그러나 풀들은 이제 겨우 시동만 걸었을 뿐 가속페달도 밟지 않았다. 풀들의 생명력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몸소 느껴보기 위해서는 하지가 지나고 장마가 시작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텃밭을 일구는 이들은 입하를 넘기면 김장농사를 짓는 초가을까지 얼굴이 까맣게 익도록 단내를 풀풀 풍겨가며 풀과 씨름을 한다. 덕분에 농사 좀 지어봤다 하는 이들은 내남없이 풀을 적대시하기 마련이다. 풀속에서 난민처럼 괴로워하는 작물을 보면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땡볕 아래서 헉헉 김을 매면서도 어쩐지 풀이 밉지가 않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농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작물보다 곱절 빠른 속도로 자라는 풀들을 보면서 적잖이 당황하기는 했지만 김매기를 할 때는 왠지 그냥 미안했다. 열 평이 이십 평이 되고, 이십 평이 육십 평이 되어서도 나는 김매기를 할 때마다 풀들아, 미안하다 입속말을 읊조렸다. 내 딴에는 나 좋자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게 차마 내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김매기를 안 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다보니 낫으로 풀의 밑동을 사각사각 벨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미안하다 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기계의 도움 없이 삼백 평 넘는 텃밭을 일구게 되면서부터는 풀에 대한 연민이 그냥저냥 무뎌지고, 예초기 지나간 자리에 풀 비린내가 진동할 때에도 더 이상 미안하단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김매기는 무심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고 풀이 말끔히 정리돼서 환해진 텃밭을 둘러보면 여간 상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은 탓일까, 채 싹이 올라오지도 않은 울금밭을 울울창창 뒤덮은 풀들을 정리하는데 문득 뿌리 뽑힌 채 두둑 위에 가지런히 누워서 죽어가는 풀들과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같이 싱그러운 풀들 사이에 무심히 서있는 내가 보였다. 순간 곤혹스러웠다. 한없이 애잔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차마 내키지는 않으나 그래도 일 년 농사를 생각해서 김매기를 끝내야만 하는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막걸리 한 잔과 함께 일손을 재우칠 수밖에 없었다.
농사짓는 마음은 풀과의 공존을 꾀하기가 쉽지 않지만 자연이 일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풀은 자연의 전령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흙이 척박하면 척박할수록 그 흙을 살리기 위해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풀들을 구슬땀 흘려가며 키워낸다. 그렇게 자라난 풀들은 최선을 다해서 흙을 돌보고 흙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풀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흙은 점점 비옥해지고 더 큰 생명들을 다 아우를 만큼 흙이 원시의 생명력을 되찾으면 소임을 다한 풀은 죽어가는 흙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난다.
예전에는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려고 애를 썼는데 흙을 만지며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몸에 쌓이다보니 자연이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마음에 담기고 김매기를 하는 손길은 자꾸만 조심스러워진다.
세상이 풀을 대하는 방식이 내 일상에 깃들어있지는 않은지 자꾸만 되돌아보게도 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