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양신문]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분이 세상을 떠난 지 꼭 30년이 되는 지난 5월. 그러니까 91년 5월 8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학생운동을 한 죄로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지하 감옥에서의 제 절망은 끝이 없었습니다. 결국 병을 얻었고 감옥 밖으로 진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참담한 슬픔을 알게 된 것은 그때였습니다. 치료 후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을 때 들려온 TV 정오 뉴스.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아침 7시경 서강대학교 옥상에서 한 남자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인 후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신원이 확인된 남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로…”
순간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수갑과 포승에 묶인 채 달려들 듯 TV에 코를 박으며 화면을 살펴봤습니다. 그랬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그 사람, 김기설 형이 맞았습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김기설을 처음 만난 때는 그해 3월이었습니다. 점거농성 중인 대학으로 찾아온 그에게 당시 22살이었던 저는 울며 막 항의했습니다. 학생회장이 의문사로 죽고 그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또 한 명의 학생이 분신까지 했는데도 누구 하나 관심이 없다며 찾아온 그에게 항의하고 따진 것입니다. 그런 제 말에 그는 어떤 항변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미안하다고만 했습니다. 자기가 잘하겠다며 위로해 줬습니다. 그때 누군가에게 들은 최초의 사과이자 위로였습니다.
하지만 그 며칠 후 저는 구속되었고 그러다가 그날 TV에서 뉴스로 다시 그의 얼굴과 이름을 마주하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래서 듣게 된 훗날 사연. 그날 김기설이 분신하기 전 그의 분신 결심을 눈치챈 사람들이 미리 써 둔 유서를 찢으라고 한 후 그가 유서를 찢자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모진 마음을 먹게 된 이유 말입니다. 그러자 김기설은 말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활동가로서 현장에서 만난 산재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과 또 동우대 학생들의 절망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 무능이 괴로웠다고. 그래서 내 목숨이라도 던져 그들 대신 우리 사회에 항의하는 한편 희망을 주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선배는 “그래도 죽는 것은 안 된다. 살면서 싸우는 게 현명한 일이다. 우리 함께 가자”며 달랬고 그렇게 김기설 역시 마음을 되돌린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날 새벽녘, 그는 결행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저는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써 준 혐의로 구속된 강기훈 무죄석방 대책위를 스스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무급 간사를 자청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김기설이 ‘저에게 지킨 의리처럼 저도 의리를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작된 사건으로 빼앗긴 그의 유서라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구속된 강기훈 씨가 무죄이면 그 유서가 다시 김기설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 아닌가 싶었던 것입니다. 이어진 고난의 세월, 마침내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강기훈 씨에게 ‘재심 무죄’를 선고합니다. 무려 2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김기설 열사가 돌아가시고 30년이 된 오늘, 저는 늦었지만 이제 그의 외침을 세상에 전하려 합니다. 그가 목숨 걸고 외쳤던, 그러나 대필 공방으로만 기억된 그의 절규를 알리는 것은 살아남은 저의 마지막 의리이기 때문입니다.
유서 전문입니다. 착했던 사람, 김기설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
단순하게 변혁 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맑은 현실과는 다르게,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얻은 결론이겠지요. 노태우 정권은 퇴진해야 합니다. 민자당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만을 안겨주는 지금의 정권은 꼭 타도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과 아픔을 안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죄악스러운 행위만을 일삼아온 노태우 정권을 향해 전면전을 선포하고 민중권력 쟁취를 위한 행진을 위해 모두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 김기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