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공초문학상 수상한 허형만 시인 

허형만 시인이 49년 동안 쓴 시들 중에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애송시가 적지 않다. 그렇지만 허 시인은 “이것이 나의 대표작이요라고 말하는 태도는 아직 시인으로서 오만하다”라고 말했다.
허형만 시인이 49년 동안 쓴 시들 중에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애송시가 적지 않다. 그렇지만 허 시인은 “이것이 나의 대표작이요라고 말하는 태도는 아직 시인으로서 오만하다”라고 말했다.

많은 애송시에도 “대표작 없다”
자기성찰에서 건져 올린 시
‘뼛속까지 젖은 시’ 향한 여행  

[고양신문] 고양시 덕양구 원당에 살고 있는 허형만(76세) 시인은 등단 이후 49년 동안 19권의 시집을 내고도 스스로 대표작이 없다고 말하는 시인이다. 소리꾼 장사익이 불러 더욱 알려진 ‘아버지’나 ‘파도’같은 시도 있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녹을 닦으며’라는 시도 있고, 하다못해 겨울 내내 광화문 교보생명 건물에 걸렸던 ‘겨울 들판을 거닐며’라는 시도 있는데, 대표작이 없다고 말한다. 허 시인은 “이것이 나의 대표작이요라고 말하는 태도는 아직 시인으로서 오만하다”라고 말했다. 

허 시인에게 대표작이란 언제나 ‘이제부터 써야 할’ 시들 중에 있다. ‘오늘 저녁에 쓰는 시가 혹시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라는 희망이 그가 계속 시를 쓰도록 하는 힘이다. 그렇게 허형만 시인은 스무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1년 문학잡지에 발표된 수많은 시들 중에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정된 단 한편의 시가 있다면, 그 시를 대표작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본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허형만 시인은 위에 열거한 시들 외에 또 한편의 대표작을 가진다고 불 수 있다. 허 시인은 지난 3일 공초문학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공초문학상은 공초(空超) 오상순(1894~1963) 시인을 기리기 위해 1993년 제정된 상으로, 이해부터 해마다 시작품 단 한편을 선정하는 상이다. 공초문학상은 시집 한 권에 주어지는 상도 아니고 시적 성취를 이룬 시인에게 주어지는 상도 아니다. 오롯이 시 한편에 주어지는 상이다. 올해까지 이형기, 신경림, 오세영, 이탄, 김지하, 정현종, 정호승, 나태주 등 29명의 시인의 작품이 선정됐다.

허형만 시인의 공초문학상 수상작은 ‘산까치’라는 시다. 시인은 비오는 날 원당의 성사체육공원 인근 나지막한 산의 숲길을 거닐다가 신나게 뛰노는 산까지 몇 마리를 본다. 산까치들과 동화되고 싶어 우산을 접고 살금살금 다가가지만 산까치는 나무 위로 달아나버린다. 이 때 시인은 ‘하이고, 못 본 척 그냥 되돌아갈 걸’이라고 탄식하며 미안함을 느낀다. 이 미안함은 엄청난 힘을 가지는 데, 이 힘은 시인을 자기성찰의 영역으로까지 내몬다. 산까치와 산딸기와 산속 모든 것은 젖을 대로 젖어있는데, 오로지 그만이, 그리고 그의 시만이 아직 덜 젖어 있었던 것이다. 이 18행의 시는 결국 ‘시여 젖어라’라는 5음절로 수렴된다. 

산까치 

보슬비 오시는 날 
날마다 찾아가는 산길을 걷는데
저만치 산까치 대여섯 마리
보슬보슬 젖는 길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다
나도 함께 뛰고 싶어 우산을 접고
비에 젖으며 가만가만
다가가는데 
눈치 빠른 산까치들 
후르르 나뭇가지 위로 날아오른다
하이고, 못 본 척 그냥 되돌아갈 걸 
미안해하며 비에 젖어 걷는다
젖어라 시여 
심장 깊이 젖어라 시여 
산까치도 젖으며 노래하나니
산딸기도 젖으며 붉게 익나니 
보슬보슬 젖은 시는 부드럽나니
젖어라 시여 
뼛속까지 젖어라 시여 

허형만 시인은 이 시를 혼자 힘으로 썼다고 말하지 않는다. “숲길을 거닐 때 마침 내리던 그날의 보슬비가 도왔고, 그날의 산길이 도왔으며, 그날의 산까치가 도왔고, 그날의 나뭇가지가, 그날의 산딸기가, 그 산딸기의 붉음이, 나아가 이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이 도왔다”고 말했다. 목포대 교수로 30년 동안 현대시론, 현대시사, 현대시인론, 시창작론 등 시와 관련된 학문은 모두 가르쳐본 시인이 내린 지론은 “우주의 삼라만상 앞에서 겸허하지 않는 시인은 좋은 시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의 겸허함은 “저에게 배운 학생들을 제자라고 일컫기보다 저와 함께 공부하고 같은 길을 동행하는 벗, 불교용어로 도반(道伴)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제자가 없다고 말해요”라는 말에도 스며있다.  

목포대 교수로 30년 동안 현대시론, 현대시사, 현대시인론, 시창작론 등 시와 관련된 학문은 모두 가르친 시인이 내린 지론은 “우주의 삼라만상 앞에서 겸허하지 않는 시인은 좋은 시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목포대 교수로 30년 동안 현대시론, 현대시사, 현대시인론, 시창작론 등 시와 관련된 학문은 모두 가르친 시인이 내린 지론은 “우주의 삼라만상 앞에서 겸허하지 않는 시인은 좋은 시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허 시인에게 시 쓰기는 자기성찰과 동일하다. 그는 서정시의 근본은 자기성찰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한국문인협회와 민족문화작가회의 모두 이름을 걸치고 있지만, 두 곳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이른바 ‘문단정치’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자기성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시 쓰기와 자기성찰은 잠을 잘 때 시인의 무의식에서도 진행된다.   

“저도 몇몇 시인들처럼 밤에 잠을 잘 때 머리맡에 종이와 볼펜을 놓아둡니다. 자다가도 시 귀신, 이른바 시마(詩魔)가 저를 불쑥 건드릴 때가 있어요. 시마가 쓰다만 시를 이렇게 고쳤으면 좋겠다라든가 시를 이렇게 이어갔으면 좋겠다라고 제게 가르쳐줍니다. 시마가 나를 건드렸을 때 바로 그 때 시를 쓰지 않으면 안돼요. 기다린다 하더라도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이 시마거든요.”  

이처럼 잠 속에서나 잠에서 깨어서나 허형만 시인의 모든 시적 에너지는 ‘심장 깊이, 뼛속까지 젖은 시’를 향해 있다. 허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시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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