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고양신문]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장맛비가 내리면서 갑자기 한가해졌다. 열흘 남짓 쉬지 않고 비가 내린다니 뜻하지 않게 휴가를 얻은 셈이다.
이른 아침부터 거센 빗줄기가 쏴아 천지를 뒤덮고, 농막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기도 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자장가 삼아 깜빡 졸기도 하다가 문득 출출해져서 하지에 수확한 햇감자를 삶았다. 포슬포슬 잘 익은 감자를 호호 불어가며 한 입 베어 무니 이야, 감탄이 절로 나온다. 유기농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진한 감자향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이럴 땐 막걸리가 빠지면 예의가 아니지 혼자 중얼거려가며 벌컥벌컥 막걸리를 들이켠 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감자에 김장김치 한 점을 곁들이니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큼직한 감자 두 알에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나니 뱃구레가 든든하다. 시간도 널널한데 이제 뭘 할까 궁리하던 나는 소화도 시킬 겸 우산을 받쳐 들고 농장을 둘러보러 나섰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작물들은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며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있다. 나는 어린 가지 하나를 따서 와삭 베어 물었다. 으흠,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소리가 절로 나오고 가지를 씹을 때마다 끄덕끄덕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크게 한 일도 없는데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그저 자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상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종을 심은 이후로 딱히 눈에 띄게 한 일이 없다. 낙엽멀칭을 한 덕분에 풀과 씨름도 하지 않고, 물을 주지도 않았으며, 벌레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도 않았다. 내가 이토록 게으르게 농사지을 수 있는 건 순전히 자연 덕분이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오월로 접어들면 그야말로 온갖 벌레들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없다. 특히 골치 아픈 건 무당벌레와 진딧물이다.
무당벌레는 감자와 가지와 토마토의 잎을 사정없이 먹어치우며 멀쩡한 잎을 그물망으로 만들어놓고, 진딧물은 작물에 닥지닥지 달라붙어 진을 빨아먹으면서 바이러스 질환을 퍼뜨린다. 더 큰 문제는 녀석들의 번식속도이다. 설마 하고 며칠만 방심을 해도 녀석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수를 불려서 농장 전체에 피해를 입힌다.
그런데 우리 농장에서는 녀석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칠월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가지와 토마토 잎은 구멍 하나 없이 매끈하다. 감자 역시 수확 전까지 구멍 뚫린 잎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진딧물이 정말로 좋아하는 양배추와 오이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나는 자급용으로 양배추를 여섯 포기 심었는데 어느 날 그 중 한 포기에 진딧물이 바글바글 달려들었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십여 일이 지나서 다시 들여다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진딧물은 거의 사라지고 양배추는 실하게 속이 차오르고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흙이 건강해지고 생태계가 살아나면 자연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대부분의 일들을 해결해준다. 우리 농장에 벌레피해가 없는 건 생태계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주인인 텃밭에는 수많은 천적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어서 해충이 창궐할 수가 없다.
자연이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탓일까, 요즘에는 우리 삶의 생태계도 저처럼 거룩해질 수 있다는 믿음의 싹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