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화로 일제강점기 때 축소... 원래 벽제관 영역 파악 노력
원형 복원하는 기초자료 활용
일제강점기 때 축소·관광지화
원래 벽제관 영역 파악 노력
서쪽 도로까지 넓었을 개연성
[고양신문] 고양시는 지난 4월부터 벽제관지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이번 조사는 고양 벽제관의 문화재구역(4150㎡) 가운데 1998년 발굴조사를 통해 이미 조사된 벽제관의 주 건물지를 제외한 미조사 지역 2426㎡를 중심으로, 벽제관의 담장 유구(遺構·건물의 자취) 확인 등 향후 원형 정비·복원을 위한 고고학적 기초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추진돼 왔다. 조사에 소요된 예산은 약 2억3000만원(국비 70%·도비 15%·시비 15%)이었다.
지난 5일에는 정밀발굴조사에 대한 성과와 향후 보존 방향 등을 검토하기 위한 학술자문회의를 벽제관지 조사현장에서 개최했다. 고양시는 학술자문회의를 통해 이번 정밀발굴조사로 벽제관의 원형을 가늠할 수 있는 담장과 부속 건물 등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점을 성과로 내세웠다.
특히 벽제관을 기준으로 북서쪽에서 1∼2단의 기단이 잔존하는 폭 1m, 길이 11m 규모로 추정되는 담장 유구가 발견됐다. 북서쪽 담장 유구는 기단의 방향이 서쪽으로 뻗어 있어 벽제관의 원형이 도로(동현로⟶벽제관로) 방향으로 연장됐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동쪽에서는 건물 기둥 자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건물의 유구가 발견됐다. 이번 정밀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조사관에 따르면, 동쪽 건물 유구는 배치 형태로 보아서 최소 정면 5칸의 건물로, 건물의 정면이 벽제관의 주 건물지를 향하고 있어 벽제관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시는 고지도 상의 간략한 표기와 근대기 사진 등 제한적인 자료 때문에 벽제관 원형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해도 이번 조사로 벽제관의 일부 영역과 실체를 확인한 것은 성과로 보고 있다.
시는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벽제관의 원형 정비·복원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재준 고양시장은 “발굴조사에서 새롭게 확인된 벽제관의 담장과 부속 건물 유구 등은 벽제관의 잃어버린 원형을 회복할 수 있는 기초자료로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며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벽제관의 원형 정비·복원을 비롯해 고양동의 잃어버린 역사성도 동시에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4월 벽제관지를 방문했던 김현모 문화재청장도 당시 “벽제관지 미발굴구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마무리한 후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벽제관지 복원을 연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고양시가 벽제관의 원형을 정비·복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벽제관이 자리 잡고 있었던 담장 윤곽을 통해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벽제관 원형을 훼손시키고 임진왜란 전승지로 기념하기 위해 관광지로 전락시켰다. 일본에 의해 원형이 훼손된 이후 한국전쟁 때는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있던 정문인 삼문(三門)마저 소실돼 빈 터만 남게 됐다. 한성문화재연구원의 장종빈 조사관은 “벽제관 동쪽에서 발견된 부속 건물 유구로 보아서는 일본이 임진왜란 전승지로 기념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부속건물을 많이 헐어내고 벽제관 영역을 축소시키면서 관광지로 정비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일본이 벽제관 영역을 어느 정도까지 축소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장 조사관은 “한양의 궁궐의 경우는 옛 문헌이나 자료에서 배치가 상세하게 잘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벽제관처럼 지방 고을 중심의 읍치에 있는 건물은 어떠한 배치였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이번 조사로 인해 벽제관의 원형이나 예전 모습을 전체적으로 다 파악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번 발굴조사의 의미라면 일제에 의해 축소되기 전 벽제관의 구체적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라고 설명했다. 시 문화예술과 이성규 팀장은 “지금의 벽제관 터에 남아있는 형태보다 벽제관 건물이 약 3배 정도는 더 규모가 컸을 것이라고 보는 문화재청 위원들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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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 한양 오기 하루 전 여독 풀던 곳
고양동 벽제관은 어떤 곳?
조선은 천자를 대신한 명나라의 사신을 가볍게 모실 수 없는 나라였다.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벽제관이라는 객사에 여장을 풀고 유숙하도록 했다. 즉 사신이 북경을 출발해 의주를 거쳐 남행하는 동안 쌓인 여독을 풀어던 장소라고 볼 수 있다.
벽제관은 조선시대 이전인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세종대에 크게 개축된 것으로 문헌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ㄴ “1426년(세종 8) 8월에 현감 하부(河傅)와 감사 심도원(沈道源)의 노력으로 허물어진 공관(公館)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1428년 11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는데, 당시 벽제관에는 동헌(東軒)과 서헌(西軒), 문묘(文廟), 남별관(南別館)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벽제관은 선조가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천병(天兵), 즉 명나라 군사를 위해 제사를 올리라 명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1월 27일 이곳과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이른바 ‘벽제관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대패했다. 조명연합군을 이끌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평양을 탈환한 여세로 서울에 쫓겨 있는 왜군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복병을 진흙밭에 설치하고 대기하며 위장전술을 펴던 왜군에게 예봉이 꺾여 후퇴한 유명한 전장이었다.
지금의 덕양구 고양동(벽제관로 34-16번지)에 있는 터 위에 세워진 벽제관은 인조 3년(1625)에 고양시로 옮길 때에 세운 객관으로 그후의 중건은 확실치 않다. 삼문을 비롯한 그나마 남아있던 벽제관은 한국전쟁으로 전부 소실되고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의 터인 '벽제관지'는 4150㎡(1255평) 규모로 1965년 2월 2일 사적 144호로 지정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