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권우 도서평론가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초여름부터 지금껏 능력주의를 주제로 책을 함께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다. 입때껏 읽은 책은 『20대 80의 사회』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능력주의』 등이다. 『20대 80의 사회』는 상위 20퍼센트에 드는 부모세대의 지위가 대물림되는 현상을 톺아보았다. 미국을 분석대상으로 삼았지만, 우리 실정과도 워낙 닮아 있어 충격을 받게 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는 청년세대가 수능점수에 따른 서열화를 능력주의 관점에서 수용하고, 이른바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해 무한 경쟁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이쯤해서 함께 읽어볼 만한 책이 롤스의 『정의론』. 이 책은 『20대 80의 사회』와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비중 있게 인용되었다. 하지만 영어권 독자도 읽기 어렵다고 정평이 난 이 책을 완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롤스 편을 함께 읽어보았다.
 
국내에 롤스는 예상보다 일찍 소개되었다. 1971년에 『정의론』이 나왔는데 번역본은 1979년 출간되었다. 하지만 영향력은 별로 없었다. 군부독재가 판치는 세상에서 무지의 장막이라는 조건에서 공동체의 원칙을 세운다는 사회계약론의 관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테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득세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정의론』만큼 시사하는 바가 큰 책도 드물다. 롤스는 원초적 상황에서 공동체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을 결정하는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사회계약을 맺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전혀 모른다고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센델은 이 사고실험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선택하는 합의이기에 공정하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무지의 장막이라는 조건에서 사람들은 어떤 원칙을 선택할까?
 
먼저 공리주의는 선택하지 않을 테다. 내가 억압받는 소수일지도 모르는데, 최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원칙을 동의할 리 만무하다. 다음으로는 시장경제체제에서 얻은 수익을 독점하는 권리를 인정할 리 없다. 롤스는 뒤엣것에 주목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수용하는 원칙이 있으니, 바로 가장 약한 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라며 이를 일러 차등원칙이라 이름지었다. 이 대목에서 센델의 설명은 빛을 발한다. “무지의 장막이라는 장치 밑에는 사고실험과는 별도로 도덕적 주장이 깔려”있는 바, “요컨대 소득과 기회의 분배는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의 요소를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있다고 말했다. 임의라는 낱말은 우연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롤스가 말한 도덕적 임의성에 드는 첫 번째 항목은 기회가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는 현실을 말한다. 삼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삼루타 친 줄 안다는 상황이다. 이 같은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다양한 사회정책이 요구된다. 두 번째 항목은 타고난 운 또는 재능 문제다. 한 개인이 태어난 가정과 사회환경이 유리하다면 그 사람이 높은 성과를 거둘 가능성은 크다. 강남출신이 서울대에 더 많이 입학한다는 통계를 떠올리면 된다. 다음으로는 특정한 시기에 사회가 가치를 두는 자질의 우연성 문제다. 마이클 조던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고 가정해보면 무슨 뜻인지 금세 눈치챌 터다.
 
롤스는 재능이 선사한 포상을 누릴만한 만한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말한다. 공정성을 내세우는 청년이라면 반발할 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롤스의 말이 맞다. 오늘 우리가 능력을 발휘해 얻은 성과는 경제와 문화자본이 갖춰진 부모 덕에, 그리고 21세기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가능했다. 그러기에 센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라고 말했다.

능력 있다 뽐내며 더 많은 것을 누리기보다 이런 삶이 가능했던 조건에 감사하며 겸손할 일이다. 능력주의를 공부하다 보면 센델의 말대로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더 관대한 공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운을 실력이라 우기며 성과를 독점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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