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박수택 생태환경 평론가
박수택 생태환경 평론가

[고양신문]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넘어가는 길목, 제주대학교 근처 한라산 기슭에 키가 20m쯤 되는 우람한 곰솔 8그루가 모인 산천단(山川壇)이란 유적이 있다. 산천단 곰솔은 나이가 500~600년쯤으로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고려 때부터 제주를 다스리는 수령은 해마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백성들이 엄동에 눈 쌓인 험한 산길을 제물 지고 올라가다 숨지거나 다치는 사고가 잇따랐다. 조선 성종대에 어느 목민관이 결단을 내렸다. 한라산 기슭 곰솔 숲에 제단을 마련해서 힘들여 산봉우리까지 안 가고도 제를 올릴 수 있게 한 것이다. 큰 나무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존재라는 백성들 믿음까지 헤아린 지혜로운 제주 목사, 그는 이약동이다. 산천단에는 백성의 고통을 덜어준 이약동의 선정을 기억하고 기리는 비가 서 있다.  

왕조 시대에 천하의 주인은 왕이고 지방관은 ‘청지기’ 직분이다. 청지기에 해당하는 영어 스튜어드(steward)는 서양 중세 봉건시대에 영주를 대리해 장원을 총괄 관리하는 사람을 이른다. 스튜어드는 농민에 비해 좋은 집과 옷, 풍성한 음식 같은 특전과 편익을 누렸지만 누리는 재물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맡아서 관리하는 본분’에 충실하다는 건 시쳇말로 ‘주제 파악’을 잘 한다는 뜻이다. 청지기 정신 없는 벼슬아치들 횡포에 시달리다 못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역사는 동, 서양에 구분이 없다. 우리의 경우 19세기 초 홍경래의 봉기를 비롯한 농민들의 항쟁과 동학혁명, 현대에 들어와 이승만 독재에 항거한 4.19혁명, 군사정권에 맞선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역사가 숨을 쉰다. 민주공화국 시대에 주인은 국민이고 청지기는 정부다.
 
청지기의 직분은 세상 사람 누구나 지고 있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잘 기를 책임을 진다. 그렇다고 자식이 부모 소유가 아님은 물론이다. 금융기관은 고객의 돈을 맡아 관리하고 불리는 책임을 진 청지기다. 기업은 투자 주주들의 청지기이면서 소비자 고객의 권익도 보살펴야 할 청지기, 국가 경제에 기여할 책임을 진 청지기다. 교사는 학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맡아 지식과 덕성, 체력을 기르도록 이끄는 청지기. 종교인은 각자 교리와 신앙 숭배의 대상인 절대적 존재의 가르침에 따라 교인 신도를 교화하고 인도할 책무를 진 청지기다. 언론인은 국민의 알 권리를 책임진 청지기요, 공무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국회의원, 대통령까지 모두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청지기로서 법에 따라 정부 기관, 지자체, 나라를 이끌어갈 책무를 다해야 마땅하다. 

청지기 직분을 망각하고 자기 뱃속 채우는 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 개발 정보를 빼돌려 땅 투기한 LH공사 직원들과 공무원들은 곡식 창고에 구멍 내는 쥐떼나 다름없다. 공적인 책무를 가진 자들이 왜 그 자리에 앉아있는지 깨닫지 못하면 세금 도둑이면서 국토 환경 파괴 공모범이다. 노태우 정권부터 현 정부까지 새만금 바다 막아 갯벌 죽이고 환경 망치는 일을 계속한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에 22조원 넘게 쏟아 붓고 녹조 댐을 16개나 만들었다. 제주지사는 관광객 더 받겠다며 제2공항을 추진하고 제주도의회는 아름다운 숲 밀어내는 비자림로 확장 공사를 계속하라고 최근에 결의까지 했다. 경남 하동군수는 지리산 산악열차, 강원도지사와 양양군수는 설악산 케이블카에 목을 맨다. 여기저기 공항 건설 공약 외치는 정치인들은 또 어떤 청지기인가?
 
기후 위기가 닥쳤다. 현 세대 인간들이 이익과 편의에 사로잡혀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고 망가뜨린 결과다. 인류의 삶터 지구는 우리뿐 아니라 미래 세대의 것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구가 ‘우리의 공동의 집’인데도 ‘우리가 지구를 마음대로 약탈할 권리가 부여된 주인과 소유주로 자처하기에 이르렀다’면서 우리가 지구를 맡아 잘 관리하고 지키는 청지기여야 함을 일깨워준다. 정치에 대해 교황은 ‘사회 모든 분야에 존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자유를 보장하면서 또한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이들이 공동선(共同善)을 위하여 더 큰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제196항). 대통령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은 여전히 거대 개발 공약만 늘어놓고 서로 깎아내리기 말싸움뿐이다. 유권자 시민들의 감별안이 중요하다. 기후위기 시대를 헤쳐갈 선하고, 지혜롭고, 유능한 청지기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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