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고양신문] 올 가을농사는 그야말로 대풍이다.
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큰다고는 하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농사는 사람이 짓지만 그 결과는 오로지 하늘에 달려있다. 가을 작물들이 한창 여물어야 할 시기에 지긋지긋하게 퍼붓는 빗줄기에 사람이나 작물이나 다 같이 몸살을 앓았던 작년 가을 날씨를 생각하면 똑 그러하다.
백여 포기 심었던 배추는 절반 이상이 속이 들어차지 않은 비행접시 꼴로 널브러져서 김장철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절임배추를 일부 사야 했고, 용돈 좀 벌어볼 요량으로 작정하고 심은 맷돌호박은 꽃만 달리면 쉬지 않고 퍼붓는 빗줄기에 꽃이 녹아버리는 바람에 호박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심은 고구마도 수확했다는 말이 남우세스러울 만치 성적표가 초라했고, 백오십 주를 심은 고추밭에서는 여름 내내 한숨만 쉬다가 고추 말리기를 숫제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울금과 땅콩은 궂은 날씨를 잘 이겨내고 평균 이상의 결과가 나와서 흉년에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올해에는 가을날씨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넙죽 큰 절을 올리게 좋아서 텃밭에는 풍요로움이 넘쳐나고 있다. 백육십 포기 심은 배추는 벌써 속이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고, 무도 주먹만한 엉덩이를 드러내며 쑥쑥 자라나고 있다. 여덟 평 땅콩 밭에선 땅콩이 이십오 킬로그램이나 나왔고, 고추도 이십 근 이상 말렸고, 작년에는 구경도 못했던 조롱박과 수세미도 흡족할 만큼 거두었다. 농장 회원들도 텃밭에만 나오면 싱글벙글 얼굴이 환하고, 나 역시도 그 어느 때보다 가을걷이에 기대가 크다. 특히 우리 집 겨울양식이 되어줄 울금밭을 둘러보면 절로 어깨가 으쓱거려진다. 그 어느 때보다 우람하게 자라난 울금은 하나같이 내 키를 훌쩍 넘겨서 울금밭 앞에 서면 천여 명의 병사들이 차렷 자세로 도열해있는 것만 같다.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날씨는 이처럼 중요하다.
하지만 십 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지난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날씨보다 더 중요한 건 농부의 마음과 자세인 것 같다. 자연을 섬기면서 열심히 작물들을 돌보면 크게 낭패를 볼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작년에는 이상기후로 적잖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하늘은 농부의 수고로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뭄이 들고 태풍이 몰려와도 농부들은 일 년간 수고로이 흘린 땀의 대가를 저마다 합당하게 거두어들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은 수확물이 많건 적건 세상에서 맛보기 힘든 희열을 느끼게 된다. 자연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땅에서 흘린 땀의 가치 이상의 결실을 내어준다. 덕분에 우리는 상추 한 포기, 콩 한 쪽만 심어도 노동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김준태 시인은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에서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 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고 노래했는데 텃밭에서 이 시를 음미해보면 오호라,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나는 세상이 모든 노동의 가치를 평등하게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텃밭에서는 늘 일할 맛이 나고, 수확할 때가 되면 누군가 그래, 너 참 수고했다하고 토닥토닥 등을 다독여주는 것만 같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세상도 그랬으면 참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