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새해 첫 날, 농장에 나가서 깊은 잠을 청한 농장을 둘러본다. 

헐벗은 느티나무 밑에 옷깃을 여미고 앉아서 작년 농사를 하나하나 짚어보니 올해부터 농법을 바꾸기로 한 결심이 옳은 결정이라는 확신이 선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농기구로 밭을 일구고, 온 밭에 낙엽을 덮고, 화학비료와 농약 대신 퇴비와 오줌과 막걸리로 작물들을 키워왔다. 덕분에 흙은 해마다 눈에 띄게 좋아졌고 병해충의 피해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연농법의 대가들은 농부들이 게으르게 사는 게 진짜 농사라고 입을 모으는데 나는 작년 가을 김장농사를 지으면서 그 말의 깊은 의미를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작년에 나는 김장밭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초기에 두어 차례 김을 매고, 오줌을 희석해서 웃거름을 준 것 말고는 수확할 때까지 그야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벌레가 배춧잎을 갉아먹거나 말거나 숫제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 흔한 물도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장농사는 약간의 벌레피해를 입긴 했지만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올해부터 더욱 게으르게 농사짓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사실 게으르게 사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으르게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과 인내심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자기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데 나는 땅의 생태계가 살아날 때 어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십 년 넘게 몸소 지켜봐왔다. 그 결과 게으르게 농사짓는 게 우리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푹신푹신하게 느껴질 정도로 몽글몽글해진 자유농장의 흙에서는 산에서 맡을 수 있는 상쾌한 향이 난다. 이 흙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작물을 심기 전에 땅을 뒤집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러자면 해마다 밭을 만들지 않고 농사지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오랜 궁리 끝에 틀밭에서 답을 찾았다. 

고양도시농업네트워크 산하농장인 가라뫼농장에 설치된 다양한 틀밭들. 틀밭은 버려진 폐자제를 활용해서 만들어도 좋다.

농부들이 해마다 밭을 뒤집는 가장 큰 이유는 두둑이 유실되어서 고랑과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둑을 만든 다음에 두둑 가장자리에 상자처럼 틀을 만들어주면 두둑은 애초의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흙을 뒤집지 않아도 되고 풀 관리도 한결 수월해진다. 뿐만 아니라 흙속 미생물의 활동도 더욱 왕성해지고 더 많은 수분과 탄소도 저장하게 된다. 건강한 흙이 대기 중에 떠다니는 탄소를 얼마나 많이 저장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넷플릭스에 올라와있는 다큐멘터리 ‘대지에 입맞춤을’에서는 그 경이로운 세계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나는 게으른 농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환경지킴이라고 생각하다. 흔히 우리는 농사가 환경을 보존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실은 그게 얼마나 무서운 착각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틀밭을 시작으로 더욱 게으르게 농사짓는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나갈 요량인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틀밭만 해도 그렇다. 틀밭을 만든다고 하면 굉장히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 것 같지만 하우스용 비닐과 약간의 각목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 

다가오는 봄, 자유농장에 틀밭이 늘어선 풍경을 떠올리면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만들어질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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